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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Oct 16. 2019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먼 길로 돌아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본 사람이라면 그 아픔을 알 것이다. 상실,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 어려운 것을 게일 캘드웰이라는 작가가 해냈다. 바로 '먼 길로 돌아갈까(정은문고)'라는 책이다. 작가는 소중한 친구를 잃은 과정을 덤덤히 소설로 그려내고 있다.

상실이 신체에 사하는 타격, 일시적인  착란, 직설적이진 않지만 지독히도 강렬한 일련의 감정들까지, 몇 주, 어쩌면 몇 달 동안 나는 물에 잠긴 사람처럼 행동했다.  (p187)             


상실 초기 비탄의 맹위는 가히 충격적이다. 걷잡을 수 없이 사납고 절망스럽다. 
(p189)



숨막히는 상실과 그 이후의 애도의 과정은 기본적으로 무기력하다. 애도의 초반에 쏟아지는 화환과 음식으로 잠시 우아한 외피를 두르고 있다가 그것을 벗겨낼 때가 오면 남겨진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녀를 죽게 두라. 애도의 이동경로를 정의할 수 있다면 이 세 단어가 아닐까.  
(p208)


생은 반박의 여지없는 전진운동이고, 죽은 이들 너머를 겨냥해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몇 달간 나는 시간의 폭력성을 실감했다. 우리를 태운 대형 바지선이 캐롤라인만 기슭에 남겨두고 떠나는 듯했다.  
(p210)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인간은 슬픔을 견뎌내고, 죽음은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세상에 견디지 못할 슬픔은 없는지도 모른다. 슬픔의 바다에 빠져 숨막히는 우울감을 겪을 때 이보다 더 잔인한 사실이 있을까. 희망을 부여잡고 살아내도록 채찍질하는 그 지루한 고통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팔다리가 잘려도 죽지 않는 불가사리처럼 심장도 견뎌낸다(p215)'고..


   '견디다'는 말의 또다른 의미는 '상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옛날 나바호족 사람들은 러그를 짤 때 어울리지 않는 실을 한가닥 씩 넣어 테두리를 둘렀다. 그 '의도적 결함'은 '영혼의 줄'이라고 불린다. 죽음은 기억에서 몰아내고 싶은 인간의 결함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유한하기에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함이다. 인간의 결함은 '나바호족의 의도된 결함'처럼 영혼을 깎아 다듬으며 영혼의 줄을 완성하는데, 그것이 '이야기'다. 인간은 '이야기'를 먹고 성장한다. 인간은 상실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와 함께 천천히 상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을 두 가지 뽑을 수 있다.


하나는 어느 날 저녁, 캐롤라인이 혼자 부엌에서 차를 끓이다가 갑자기 가슴에 행복감이 차올라 큰 소리로 외치는 부분이다.

세상에, 나는 즐거운 은둔자야! 그리고 게일은 명랑한 우울증 환자!


 둘 다 침울한 내향성의 소유자라는 것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두 사람이 서로의 기질을 긍정적으로 치환하여 새로이 정의하는 모습이 좋았다.


사람이 우울하면 자신의 기질을 원망하게된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지. 왜 나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지.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 그럴 때면 나도 밉고 사람들도 밉다. 하지만 나를 미워하는 것은 상황이 나아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생각들은 우울증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편이 낫다. 우울증이 떠들어대는 말도 안되게 비참한 생각들을 걷어내면 그 안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진짜 나'가 있다. 그들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봐주기 시작하면, 즉 돌봐주기 시작하면 나는 나를 용서하게 되고 타인도 용서하게 된다. 그 어떤 문제라도 용서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먼저다. 그러면 웅크렸던 나는 새로이 기지개를 켜고 캐롤라인이 그랬던 것 처럼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보기 시작하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파블로브 네루다의 94번 소네트를 차용해 묘사한 '부재'이다.

  소네트는 우리나라로 치면 '시조'같은 것이다. 정해진 운율과 박자가 있고 거기에 맞춰 쓴 시이다. 예전에, 제법 어렸을 때 시를 낭송하는 수업시간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가사로 만든 노래를 발표한 적이 있다.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들고. 고백하건대 아직도 이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난다. 너무 부끄러워서. 여기서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부재는 너무 광막해
그 안에서는 벽을 통과하며 다니고
허공에 그림을 걸 것이다

파블로브 네루다, 94번 소네트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허공에 그림을 거는 모습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몇년 전 부재의 지루한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본 일이 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큰 상실을 연달아 두 번 겪으며 고통스러워할 때였다. 그 사람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 때도 있었고, 괜찮을 때도 있었고, 그 괜찮은 순간도 안 괜찮았다고 말할 때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보다는 감당할만한 무게의 고통을 느꼈던 나는 그 과정이 도대체 언제까지 지속될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래도 살아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시간이 제법 흘러 어느 날, 이제는 예전만큼은 울지 않게된 그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너보다 내가 이런 일을 먼저 겪어서 다행이야.
다음에 너가 이런 일을 겪는다면 내가 너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잖아."

"어떻게 해야 위로가 되는데?"

"너가 어떤 고통을 겪든,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 생각할거야."


  허공에 거는 그림, 부재. 그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드라마를 보면 상황별로 주어진 감정선이 있다. 애도의 과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림을 걸 수 없는 허공에 어떻게든 그림을 걸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에게  타인이 던져놓은 위로는 도무지 위로가 안되는 것이다. '언어의 온도'에서 이기주 작가님이 말했든,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더 아픈사람'이고 아픈 사람은 서투른 말은 아낄 줄 안다.

  사람은 모름지기 말을 삼킬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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