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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Feb 11. 2021

2년 간의 휴직, 복직 후 3개월

직장 내 괴롭힘 그 후 3년

지난 3개월 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복직 후 딱 3개월이 걸렸다.


우선 나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데에 실패했다. 나의 분주함이 타인의 불안을 자극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에, 가만히 있는 데 익숙해져 보려고 했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밟혀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매뉴얼과 법령을 꼼꼼히 익히고, 지난 2년 간 팀원들의 성과를 다 정리했다. 매일 아침 청소를 하고 커피와 차를 준비했다. 팀원들이 하는 일이면 귀찮게 따라붙어 일을 배웠고, 나중에는 팀원들의 공백을 채울 수 있도록 준비했다. 처음 하는 일이지만 일을 겁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을 잘하는 데에는 그 사람이 어떤 자격을 가졌는가 보다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나에게 힘이 되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주어지더라도 그 일을 제대로 배우려는 나의 태도가 짧은 시간 안에도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할 거라 믿었다.


나는 타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일에도 실패했다. 복직한 후 한 달, 팀장님은 나에게 말했다. "너는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게 탈이야." 사실 그랬다. 나는 팀장님의 말씀을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는다. 지나가며 말한 아쉬움도 해결할 방법을 찾고, 곧 결과물을 가져갔다. 팀원들이 던지듯 하는 말도 새겨 들었다가 사무실에 변화를 주었다. 24시간 일하며 지치고 힘들었을 팀원들이 자신이 한 일에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보고서를 작성했다. 관서장과 상위 부서에 빠르게 보고했고, 우리 팀에 도움을 준 부서도 잊지 않고 챙겼다. 관서장에 보고해 상장을 만들어 주고, 간단한 음료라도 대접했다.


변한 것은 내 주위의 반응이었다.


예전에는 팀원들에게 커피라도 한 번 대접하라 치면 '네가 하면 나도 해야 되는 게 성가시다'는 반응이었고, 그들이 소리 없이 한 일들을 보고서로 만들어 주면 '너 혼자 일한 것처럼 티 내지 말라'며 타박이 돌아왔다. 팀에게 보상이 돌아가는 일이었는데도, 우리 팀의 사건이 8시 뉴스에 나 전국적인 비난을 받는 일에 빠르게 대처하면서도, 나는 팀원들의 비난을 들어야 했다. 내가 상부에 신임을 받는 게 그들에게는 영 못마땅한 일이었다. 나는 일하지 않는 선배들의 일도 도맡아 하면서도 그들의 총애는 받지 말아야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오지랖에 팀원들이 고마움을 표한다. 나에게 마음 편히 부탁을 하고 그 부탁을 잘 해낸다고 해서 시기하지 않는다. 내가 베푸는 일에 악의가 있을 거라 단정 짓지도 않는다. 내가 있어 편해졌다고, 일을 덜어 줘서 고맙다 말한다.


내가 복직한 지 딱 3개월째 되는 날, 우리 팀은 우리 분야에서 그 분기의 으뜸 팀으로 뽑혔다.

사실 다른 직원이 으뜸 팀 후보로서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 바람에 지원서 조차 내지 못할 뻔했었다. 미안하다며 급하게 좀 처리해 달라는 그 직원의 말에, 나는 내가 정리해 둔 보고서를 뒤적거려 몇 시간 안에 지원서를 완성했다. 그리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보상이 왔다. 지난 1년 간 그렇게 애를 써도 힘들었던, 우리 팀이 많이도 목말라하던 의미 있는 보상이었다.


같은 날 내가 보고했던 지난 한 달 간의 결과물로 관서장의 공개적인 칭찬을 받았다. 이 칭찬이 의미 있었던 이유는, 우리 팀이 전체 관서에서 최하위의 평가를 받았었기 때문이다. 과장님과 관서장이 줄을 세워 던졌던 평가로 인해 팀원들은 다른 직원들의 반 정도 되는 성과급을 받게 되었다. 팀장님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팀장님은 백방으로 돌아다니며 이유를 찾았고, 팀원들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일은 고되고 큰 책임이 따르는 데 비해 영광은 없는 자리였어도 하루하루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서 일해온 사람들이었는데, 관서 내에서 꼴찌 부서라는 오명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관서장의 인정을 받았다. 팀장님은 날아갈 듯 기뻐했지만, 우리 팀을 꼴찌로 평가한 과장님은 탐탁지 않아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전화해 보고서에 작은 트집을 잡았다. 그래도 나는 상처 받지 않았다.


그것이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다. 이제 나는 크게 상처 받지도, 크게 흔들리지도 않는다. 예전 같으면 쉽게 겁먹었을 일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의도로 행동하는지 그 상황을 읽게 되었고, 그 상황을 무마하려고 웃어넘기지도 않는다. 작은 불편함도 참지 않고 이야기하되, 그 순간의 분위기를 얼어붙지 않게 만드는 요령도 생겼다. 칭찬을 받는 쑥스러움도 이겨내고, 고생한 팀원의 공으로 부드럽게 돌리는 법도 익혔다.


어제는 한 여자 선배를 화장실에서 마주쳤다. 욕설로 여자 후배들에게 친밀함을 표현하던 사람이었는데 무서운 사람에게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 선배는 양치하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 인사도 없이 딱 세음절을 말했다.

"살. 쪘. 다."

사실 나는 내 인생의 대 부분을 뚱뚱한 채로 지내왔다. 살이 빠졌던 기간보다는 근육 뚱뚱이로 지내온 세월이 훨씬 길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익숙했던 그들에게는  2년 간의 휴직 후에 돌아온 나의 그 사소한 변화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는지, 친하지도 않은 여자 선배들이 알은체 하며 살쪘다는 말을 던지는 일이 빈번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양치를 계속했다. 그리고는 살짝 웃으며 "요즘에는 그런 말씀 조심하셔야 하는데요."라고 말했다. 여자 선배는 내 코트를 뒤적거리며(내 코트! 자기 코트도 아니고!) "옷 때문인가?"라고 살짝 말을 돌렸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쓸 데 없는 주제를 대화에서 배제하는 일이지 살이 쪘는지 안 쪘는지가 아니었다. "아니오. 다 살입니다."하고 살짝 웃어 보였다. 선배는 다시 내 얼굴로 시선을 돌려 "살. 쪘. 다."라고 말하며 화장실을 나갔다. 그러고는 뒤돌아서 나가는 길에 멈추지도 않고 한 마디를 던졌다.

"앞으로 말조심할게요."


여자 선배는 우리 조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다. 복장이 마음에 안 든다고 전화하거나, 밖에서 들리는 소문으로 혼을 내 군기를 잡으며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들이 두렵지 않다. 그들이 예전처럼, 성희롱 피해자인 나를 혼내거나, 음해하는 소문을 퍼뜨리거나, 기를 잡으려 비난을 퍼붓는다면 나는 이제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감수할 마음이 없다.


나는 바라는 것 없이 떳떳함을 위해 싸웠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를 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예전에 두려워하던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편함을 미소로 섣불리 봉합하고 싶은 그 순간의 불안함도 잘 이겨낸다. 나는 더 이상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순간의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써야 할 시간을 정해 놓은 것도 아니고, 내 글이 인기가 많지도 않지만 아무런 바라는 것 없이 내 속에 글이 끓어오를 때면 브런치의 하얀 화면을 켠다. 어쩌다 한 번씩 혼란과 고통 한가운데에서 내 글을 읽은 단 한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될 것이다. 바다 깊은 곳에 뿌리내려 세차게 흔들리는 물풀처럼 내 뜻과는 관계없이 흐르는 검은 파도에 흔들리며 썼던 글은 지금 보아도 뜨겁지도, 세련되지도 않다. 그러나 그때의 나처럼 해명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이가 내 글을 읽었을 때, 내가 했던 사소한 선택들이 그들의 꽉 막힌 순간에 한 줄기 대안이 될 수도 있음을,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한 줄기의 날숨이 될 수 있음을, 지금이 인생의 끝이 아님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내 부끄러운 글을 지우지 않는다.  


때로는 돌이킬 수 없이 아팠던 이를 애도하며 글을 쓴다. 지난 글은 정인이를 위한 헌정곡이었다. 한 달여간 고민하고, 20시간이 넘게 글을 썼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렇게 긴 글을 읽어주지 않을 것이다. 읽어주더라도 투박하고 불완전해서 이리저리 입 댈 사람만 더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살아야 하고, 수많은 정인이를 만나야 하는 직업이기에 그 아픔에 함께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정인이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아이의 죽음이 모래주머니가 되어 내가 가는 길마다 무겁게, 또 조심스럽게 나를 짓누른다.


그렇게 글은 나의 현재이자, 지나간 혼란이자, 앞으로의 태도가 된다.    


-


요즘은 하루 10시간에 달하는 직장생활과 나의 일상 사이의 균형을 지키는 연습을 한다. 타인에 비해 내가 너무 느린 거 같아 답답하고 불안할 때면 예전처럼 몇 번이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곧 멈춘다. 시(詩)를 찾는다. 황현산의 글을 읽는다.


홍어회는 부패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발효의 효과를 이용하여 조리된 음식이다. 우리의 불투명한 내부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이 다른 삶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황현산, <사소한 부탁> p51-


최근들어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내 삶이 생략되 빨리 흘러버리는 이유는 내가 시(詩)를 잊었기 때문이었다.  황현산의 글을 읽으면 출근길에 신발끈을 고쳐 매는 것도 시(詩)가 된다. 내 하루의 시작이 시가 될 때, 지루했던 그 순간은 숭덩숭덩 조각낸  크레파스 처럼 새파랗다가 퍼렇다가 푸르르게 물든다. 그 울퉁불퉁한 크레파스 질감으로 일상을 형형색색 칠하는 희열은 익숙함에 사라지던 시간을 붙잡아 순간 속에 영원을 드러낸다. 시간이 느려진다. 분주하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기대치 못했던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황현산의 글은, 스쳐지나간 것도 다시 보게 하고 잊고 있던 것도 꺼내보게 하여 덤덤한 말투로 그 순간을 날카롭게 짚으면서도, 매혹하지 않고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정수리 끝에서 가슴으로 청량한 폭포수를 떨어뜨려 눈물을 지어낸다. 그것이 무엇인지 단정할 수 없다. 간단하지 않은 삶의 불투명함을 짧고 적확한 언어로 짚어내기에, 그의 모든 말은 시(詩)다.

  

매일 크림이를 산책시키고, 매일 늦게까지 일하는 신랑을 기다렸다 함께 밥을 먹는다.

내가 일을 쉬게 되며 비로소 두터워진 우정의 의미를 알게 해 준 사랑하는 친구들과 수다를 떤다.

출퇴근 시간에는 형형색색의 마음을 덧칠해 줄 책을 읽고, 한 달에 한 번 정신과 상담을 잊지 않는다.

엄마 아빠와 더 자주 통화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홀로 남은 시어머니와 엄마를 잃은 조카와 시간을 보낸다.

나의 불투명한 하루는 내가 아직 타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나는 모자라지 않다.

나는 부끄럽지 않다.


욕심이 있다면 더 일찍 일어나 간단한 조깅을 하고, 하루 두 시간 공부하고 싶다.

하지만 이마저도 조심스럽다.

길가다가 만난 노숙자에게 따뜻한 도시락이라도 건넬 수 있는 지금의 마음을 잊을까봐,

그것이 겁이나 선뜻 애쓰지 않는다.


새로운 일을 만드는 것보다 잊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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