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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Oct 06. 2021

괴물이 매력적인 이유

소설 '프랑켄슈타인'과 영화 '메리 셸리'

괴물은 이름이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지식을 갈구했지만 오히려 때문에 재앙을 야기하는 창조주다. 신이 되고자 하는 창조주열망이 괴생명체를 만들었다. 괴물이 존재하게 된 건 오로지 신의 기쁨이요, 의지였다.


괴물이 느끼는 생의 감각은 불쾌했다. 굶주림에서 불안이, 두려움에서 갈증이, 빛의 쾌감에서 고통이 나왔다. 고통스러운 삶은 불가해하기만 했다.

괴물은 기쁨을 원했지만 삶은 그에게 기쁨을 주지 않았다.


생명을 가진 그 무엇이든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었나. 그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데 왜 인간들은 그가 원하는 최소한의 존재적 기쁨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그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창조자에게 버림받은 '비참한 추방자'였고, 그의 기쁨은 조롱이었다.

'나는 불행하기 때문에 사악하다(194)'

괴물은 사람을 죽였다. 괴물의 악행은 '고독이 낳은 자식들(197)'이었다. 괴물은 흉측하고 제멋대로이며 불타는 갈증에 시달리는  애욕의 화신으로 변모한다.

괴물은 고통을 나눌 수 있는 흉측한 반려자를 원했다.  창조주가 그것만 허락한다면 조용히 숨어 살겠다 약속했다. 그러나 괴물의 진정성을 믿지 않았던 그의 창조주가 약속을 파기하자, 그는 돌이킬 수 없이 폭주했다. 괴물은 창조주가 사랑하는 존재들을 모두  파멸시켰다.

프랑켄슈타인이 그의 창조물을 부정하고, 미워할수록 괴물은 그의 모든 것이 되어 갔다. 그는 지식을 향한 탐욕, 신의 지위를 탐한 오만이 그를 파멸에 이르게 했다 말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에게서 비롯되어 고통에 시달리는 괴물을 짐짓 모른 체하고,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방치해 버린 그의 나약함이 그를 추격자의 삶으로 인도하지 않았을까. 봄이 오지 않는 척박한 땅에서 영원히 괴물만을 쫓는 것 외에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괴물을 미워함으로써 괴물에게 정복 당했다.

'네 놈은 내 창조주지만, 나는 네 주인이다. 순종하라. (227)'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두려워하지만
괴물은 두려움이 없다.
그는 괴물을 영원히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나는 두려움이 없고, 그렇기에 강력하다. 뱀의 간교함으로 지켜볼 것이며, 뱀의 맹독으로 찌를 것이다. 인간아, 내게 입힌 이 상처를 끝내 후회하고야 말 것이다.(228)'


'나의 권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살아라, 그러면 내 권능이 완벽해지리라.(278)'

멈출 길 없이 날뛰던 괴물의 권능은 프랑켄슈타인의 죽음으로 비로소 끝났다.


'안녕히, 월턴! 평온함에서 행복을 찾고 야심을 피하세요(295)'


괴물은 창조주의 죽음으로 '허기진 복수심'의 대상을 잃었다. 그는 결코 복수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평생 애욕에 목말랐다. 그의 고통은 그의 분노와, 악행과, 집착으로 지리멸렬하게 꼬인 심지가 되어 광기로 바싹 타올랐다. 영원한 갈증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그는 그가 아는 한 가장 고독하고 고귀한 의식으로 죽음에 이르기로 했다.

'전 인류가 내게 죄를 지었는데, 나만 유일한 범죄자라는 멍에를 써야 하는가?(301)'

'죽음은 이제 내게 남은 유일한 위로다(302)'




소설 초반, 괴물은 신성을 지닌 존재였다. 오두막에 몰래 기거하며 사람들을 위해 장작을 패놓고 음식 훔쳐먹지 않았다. 선악과 고귀함, 사랑을 본능적으로 깨쳤고 자신을 해하지 않는 한은 그 누구도 해하지 않았다. 섬세하고 지적인 괴물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타인의 멸시에 상처 입을 때면 내 안의 어두운 경험들이 깨어났다. 그는 인간에게 악행을 저질렀지만 나는 인간으로서 그의 악행을 이해하게 되었다. 


괴물의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안정적인 세계를 쪼갠다. 괴물의 응축된 에너지가 말의 칼날을 벼려, 말소리가 날카롭게 일상을 파고든다. 보편적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진리, 그 날카로운 인식은 언제나 세상의 경계선에서 삶의 부조리를 노래하는 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진실은 아름답지 않고 가치로운 것은 고통의 베일에 쌓여 있다.


아마도 괴물은 작가 자신이 아니었을까.

익명의 여성으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으나 창조주에게 버림받은 외로운 괴물.

창조주에게 사악하다고 정의 되어, 사악하기로 마음 먹은 절박한 괴물.

그녀 안의 지성도, 감성도 반기지 않는 시대에서 고독을 업으로 여기고 살아야 했던, 신성을 지닌 괴물.

남성과 평등하게 살아가고픈 열망이 타는 목마름으로 남아, 두려움을 잊은 괴물.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을 그린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1 아버지가 메리에게

너의 작품은 모방품일 뿐이야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말은 다 지워버리도록 해.
너만의 목소리를 찾아.
Find your own voice.


#2 바이런과의 대화에서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남자고 여자는 여자죠. 젊은 여자가 집요하게 성인 남자에게 덤비는데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There is a one way.

다른 방법은 늘 있어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면 그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구요.
There is always another way.


메리는 그녀를 괴물로 바라보는 사회에서 그녀의 괴물성을 시인하고 두려움 없는 존재로 나아갔다. 그녀는 창조주의 미움을 받고 그녀를 죽이려 드는 추격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일부분이었던 창조주와 함께 죽을지라도, 그 운명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늘 주어졌던 선택지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았다. 바로 글을 쓰는 것. 그녀의 목소리를 찾는 것.


삶은 구조적 측면에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별다른 사유도 없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될 여지가 다분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결론은 아니다. 비록 그 길이 어렵다 해도, 다른 방법은 늘 있다.


괴물은 이름이 없다.

이름 없는 괴물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이의 실존적 고통 다름 아니다.

이름 없는 괴물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가고 싶었는데
불안이 우리를 동요시켰지.
하지만 고통에 맞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나만의 목소리를 찾지 못했을 거야.
내가 한 선택들이 나를 만든 거니까
아무것도 후회 안해.
-영화 '메리 셸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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