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은 자, 화병난 자, 조직부적응자
Bu-rite프로젝트 1주 차
사실 우리는 단 한 번도 세상의 중심이었던 적이 없었다. 오늘 하루도 그랬다.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겨우 눈을 뜨고, 양치를 했다. 정해진 시간에 기차를 탔고, 마지막 역에서 내렸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책상에 앉아 있었다.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누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던가, 나는 인사를 했던가. 언제나처럼 웃으며 했던가. 여기까지 걸어오며 관절과 뼈와 근육과 온갖 장기와 신경과 하물면 세포 하나까지 무수한 일을 했을 텐데, 목이 뻐근한 어느 순간에나 잠시, 어스름한 밤빛에 잠시, 나는 ‘어찌어찌’와 마주한다. ‘어찌어찌’해서 여기에 있는데, 무엇을 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라진다더니, 딱딱하게 굳은 딱지를 떼어내듯 ‘어찌어찌’를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딱지 아래 발갛게 달아오른 피 냄새가 시간을 본다. 시간을 볼 때마다 너무 늦은 것만 같다. 매일같이 보던 시계는 그 말을 해주지 않았다.
나는 조직부적응자다. 자의라고 생각했지만, 순전히 타의일지도 모르는 어떤 생각들이 나를 여기로 데려다 놓았다.
조직에서 얻은 것도 많다. 그 중에서도 보잘 것 없지만 시간개념은 확실한 월급이란 놈이 제일 마음에 든다. 깔끔하게 다림질된 명함도 얻은 것 중 하나다. 명함은 나에게 건조기 같은 존재다. 없어도 사는데는 지장 없지만, 있으면 무지 편리하다. 어디 가서 이 명함만 내밀면 더 이상 내 존재를 해명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명함만큼만 나에게 기대하고, 명함으로 나를 요약한다. 이제 엄마는 나를 설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우리 딸 공무원이잖아.”라고 말하는 데는 열 글자도 필요치 않다.
가끔은 더 많은 질문을 받고 싶다. 명함이 생긴 후로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럴 때면 이 종이 한 장이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는 거 같아 괘씸하다. 괜스레 야속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고만 싶어진다. 흡사 곯은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듯, 허공에다가 소리를 뱉고픈 충동이 일렁인다. 참아야 한다. 앓는 소리가 낫지, 곯은 소리는 잘 포장해봐야 꼰대, 잘못하면 진상이다. 더더구나 내 존재를 들켜서 좋을 건 없다.
나는 가젤이다. 가젤은 고기 맛이 좋단다. 덕분에 포식자 앞에서 달리는 영광을 누리고 산다. 가젤들은 언제나 분주하다. 죽지 않으려고 변덕스런 포식자의 기분을 살핀다. 어떤 질문에도 ‘네’라고 대답하며,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늘상 웃는 얼굴을 유지한다. 포식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쟤가 불편하다. 그러나 쟤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아는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불편한 순간을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습관이 있다.
이런 나에게도 친구들이 있다.
하나는 기억을 잃은 자다. 어디서든 핵인싸였던 그녀는 옷가게를 연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모든 기억을 잃었다. 중환자실에 있다가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기억력이 예전 같지는 않다. 그녀는 더 이상 인싸이고 싶지 않다. 책을 읽다 말고 그녀는, 이제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좋다고 말했다.
하나는 화병난 자다. 그녀의 강아지 또또는 오래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여전히 sns 가득 강아지 또또 사진을 품고 있는 그녀는 무뚝뚝해 보여도 속정이 깊었다. 그녀는 자연을 사랑해서 환경친화적인 회사에 들어갔다. 일도 잘하고 후배들을 잘 챙겨서 동료들의 신망도 두터웠지만, 상사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못했다. 화병난 자는 상사의 시기심에 직장을 잃었다.
나는 조직부적응자다. 조직에 들어가 많이 울었고, 많이 아팠다. 정신과를 다녔고, 휴직을 했다. 조직의 안온한 보호 속에서 나는 나를 할퀴어대는 조직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는 자주 만났다. 30대의 한가운데서 이렇게 절뚝거릴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러고 있었다. 시계만 보며 열심히 살았는데, 그 아래서 우리의 시간은 발갛게 부어 올라 피를 흘리고 말간 고름을 모으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을 살았던 건지, 시계를 살았던 건지 영 헛갈린다.
우리는 매일 물었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가난한 자들은 언어가 없다던데, ‘어찌어찌’ 살아온 우리들도 낡은 시계를 쥐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계 속에서 못다한 일정들이 우리를 더 서럽게 했다.「책과 세계」에서 작가는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고 했다. 우리도 병들어서 책을 읽었다. 가젤인 것을 숨기려, 병든 사자 행세를 했다. 사실 우리는 단 한 번도 사자였던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