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을 끊는 법

Bu-rite 프로젝트 7주 차

by 김반장

9시 22분. 그 남자는 로또를 사고 있었다. 그는 편의점으로 걸어 들어와 곧장 간이 테이블로 갔다. 테이블 의자가 있었지만 앉지 않았다. 굳이 짝다리를 집고 서서 그가 집어 든 것은 검정 사인펜이었다. 1분, 2분, 3분. 그의 머릿속에 보이지 않는 숫자가 널뛰는 동안 하얗게 샌 머리카락이 희끄무레하게 화면에 번졌다. 누군가가 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절대 그냥 두지 않았을 정수리였다. 9시 25분. 그는 편의점을 나섰고, 여름밤의 아스팔트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짠 내 나는 이불을 갤 것이다. 미뤄왔던 설거지를 할 것이다. 생각나는 몇 사람에게 짧은 메시지를 적은 후 종이를 꺼내 ‘미안하다’고 적을 것이다. 아까 행운의 숫자 위에 까맣게 덧칠을 해서 그런지 별다른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CCTV 속 그가 매고 있던 가방은 몇 시간 전에 바다로 가는 강어귀에서 발견됐다.

“저는 이해가 안 돼요.”

“뭐가?”

“죽으러 갈 사람이 왜 로또를 살까요?”

“나는 변사사건 현장에서 복권 많이 주웠는데?”

“왜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글쎄, 습관이 아닐까?”

습관.

사람은 통상 의미를 부여한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습관은 과거의 나와 맺은 인연이다. 불교철학 수업에서 교수님은 인간의 세포가 2년마다 완전히 재생된다고 했다. 매 순간 새로 태어나고 죽는 몸속 세포는 분명 어제와 지금이 같지 않은데, 지루하게 반복하는 과거의 습기로만 살아가는 인간의 하루가 또 다른 의미의 윤회라고 말씀하셨다.

과거의 나와 인연을 끊는 것은 쉽지 않다. 남편에게 두들겨 맞던 아내가 다시 남편에게 돌아갈 때, 그 무력하고 비참한 마음을 자초하는 것도 일종의 습관이다. 가보지 않은 길이 더 멀게 느껴지는 것처럼, 인간은 익숙한 고통보다 미지의 고통을 더 아프게 느낀다. 그렇기에 두들겨 맞던 사람은 늘 그래 왔듯 기꺼이 피해자다운 역할들을 감내한다. 그는 피해자로서 고통받고, 소수자로서 수치심을 느끼며, 가해자를 용서하는 지위에서 도덕적 무게를 지고, 침묵하며 포식자에게 되돌아간다.

그러나 나와의 인연이라도, 악연은 끊어야 내가 산다. 말다툼을 하고 받은 꽃이 나중에는 장례식장의 꽃이 되었다는 폴레트 켈리의 시처럼 오늘 용서한 사소한 악연은 끝내 나를 망가뜨릴 수 있다. 알을 깨고 나오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이 두렵다고 해서 알 속에서 죽을 수는 없다.


악연을 끊으려면 지금 이 순간을 다시 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나는 심리상담과 정신과 치료를 병행했는데, 자신의 성향과 잘 맞는 전문가를 만나는 것도 운이 필요한 일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두서없이 쏟아진 내 이야기 속에서 혈 자리를 짚어 내듯 죄책감에 시달리는 거대한 자의식을 발견했다. 의사 선생님은 하찮고 미워서 다그치기만 했던 내 안의 못난이를 발견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민할 때마다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금이 옆에 있으면, 금이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신경이 쓰이죠. 하지만 그것이 금의 잘못은 아니에요.

나는 세상을 보는 안경을 고쳐 썼다. 그들이 나를 미워했던 이유가 무엇이든, 금이었던 나 자신을 미워할 필요는 없었다. <아파도 아프다 하지 못하면>에서 저자는 세상을 보는 안경을 스키마(schema)라고 부른다. 스키마는 자극에 대한 인간 반응을 결정하는 인지적 틀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스키마 안에서 생각하고 그에 따라 반응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절대적 진리 같지만 멀리서 보면 각자 오래 묵힌 습관 다름 아니다.

스키마가 변하면 익숙했던 현상이 달리 보이고, 그에 대한 반응도 변한다. 나는 전문가들의 조언대로 나에게 일어난 일을 나와 타인과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는 법을 익혔다. 생동하는 연결망에서 파편화된 자아상 중 가장 자비로운 놈을 꺼내 나를 다독였다. 하찮고 못난 내 자신을 다그치기를 그만두고 감각을 이완시켰다.

변화는 쉽지 않았다. 악연이라 해도 나는 난데, 옳다 믿었던 것들이 와장창 부서지자 격랑 한가운데 홀로 눈이 먼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매일 혼돈과 의심 속에 내던져졌다. 스키마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데 소비되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알고리즘이기도 했다. 외부 자극을 분류하고 일정한 반응을 반복하는 사고 체계가 있으면 매 사건마다 감정적으로 동요할 필요가 없겠지만 원래의 스키마를 잃어버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책을 열었다. 연필을 긋고 읽다가, 쉬다가, 쓰다가, 다시 훑으며 혼돈의 한가운데서 투명한 안경알을 갈듯 글을 읽었다. 망망대해에서 단어를 찾아 오도독 씹었다. 배가 부르지 않았다. 단어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여백이 더 중요했다. 침묵하는 시간에야 얼마나 좋은 대화를 했는지 알 수 있고, 집에 혼자 남은 시간에야 얼마나 좋은 하루를 보냈는지 알 수 있듯, 좋은 글은 빈 여백에서 내 안의 심상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실격된 인간으로 태어나 벌레가 되어 존재의 거짓말을 기웃거리고 있는 내가 왜 살아야 할까. 글의 여백에 질문을 그려 넣었다. 질문을 사랑하면 언젠가 그 답을 살게 된다 했던가. 책을 읽을수록 나는, 혼돈의 세상에 외따로 던져진 점이었다가, 인류의 역사라는 선이었다가, 광대무변한 우주의 티끌이 되었다. 삶은 한낱 인간이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로 흘러가는 것이기에, 사는 동안 원치 않았던 변화라도 두 손 벌려 환대해야 한다는 울림이 눈앞에 우뚝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누군가가 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절대 그냥 두지 않았을 정수리였다.

모두가 죽음 앞에 평등한 인간일 뿐이었다. 불안하고 모자란 존재들 사이에서 내 삶이 내 맘 같지 않음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한낱 모자란 인간임을 수치스러워할 필요도 없었다.


딱딱한 스키마가 깨어진 자리에 선선한 바람이 불고 허공에 심상을 걸 수 있는 투명한 언어의 집이 자라났다. 이제 집 문을 활짝 열고 손님 맞을 준비를 다. 언젠가 이 집도 무너질지 모르지만, 서운하긴 해도 아까워하지는 않으련다. 꼬리를 세우고 살그머니 배 채우러 들어오는 고양이든, 비를 피하려 종종 거리며 날아오는 참새든, 줄 수 있는 것은 뭐든 주고 주지 못할 것에 미련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생동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려고, 나는 여전히 헬스장 가듯 책을 읽고 바디 프로필 찍듯 상담을 받는다. 당장 맞춰보지 못할 로또라도, 소중한 오늘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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