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

Bu-rite 프로젝트 8주 차

by 김반장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갈까, 말까 갈등이 나를 미혹하여 괴로웠던 시간들은 그 결심에 한 치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은 예전처럼 나를 옭아맸고 나는 도망갈 핑계를 찾으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몸살을 앓았다. 사람이 궁해지면 귀신의 도움이라도 받고 싶어 지는지, 난생 처음으로 이름에 꽃이 핀 집을 찾아 갔다. 휘파람을 분 다음에는 애기신이 따라온다는 용한 점집이었다.


돌아가. 너 갈 자리 있어.


신탁은 단순했다. 눈물이 찔끔 흐르고, 선택의 기로마다 결국은 신탁을 행했던 그리스 신화의 영웅처럼 운명의 시험대에 오르는 나를 보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물귀신도 이렇게 나를 매혹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한 번은 돌아가자.


이대로 장렬히 전사했다는 패배의 기록은 그만두자. 정약용이 유배 가서 500여권의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의 자신을 100년의 관점에서 보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게 보아야 한다. 살아 있는 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차라리 조직의 똥이 되자.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똥이 되서라도 살아남자. 그렇게라도 살아 있다 보면 좋은 날도 오겠지. 혀가 나방 같이 퍼덕이며 '똥'의 된소리를 내자, 마음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벼웠다. 나는 조직의 똥이 될 준비를 했다. 사람들이 나를 피해도, 당당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만반의 준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한 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복직 후, 화장실에서 한 선배를 마주쳤다.

만날 때마다 인사 정도는 하는 무서운 선배였다. 무심한 표정도, 가끔 내뱉는 욕설도, 나약한 윗사람과 언성을 높였다는 무성한 소문도 그녀의 차가운 아우라와 맞아 떨어져 신화 속 호랑이나 곰 처럼 비현실적인 공포를 자아냈다. 그녀는 양치하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 인사도 없이 말했다.

"살. 쪘. 다."


어째 오랜만에 본 후배보다는 후배의 살덩어리에 더 관심이 많은지, 친하지도 않은 선배들이 알은체 하며 살쪘다는 말을 던지는게 영 피곤했다. 뒷목이 살짝 아려와서 희뿌연 물을 뱉다 고개를 들고 그녀를 봤다.

"요즘에는 그런 말씀 조심하셔야 하는데요."


선배는 내 코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가 입고 있는 코트 처럼. 그녀가 부끄럼도 없이 내 코트를 들추어 이리저리 들여다 보자 나는 창자 빼낸 생선처럼 기운이 빠졌다.

"옷 때문인가?"

내 살덩어리가 잘못이 아니라, 옷이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였다.

"아니오. 다 살입니다."

미안하다. 옷이 아니다. 내 코트까지 헤집어도 내 속만 뒤집힐 뿐 나에게 유리한 증거가 나올 것 같지 않아 순순히 자백했다. 나는 그녀 멋대로 내 살을 유죄로 기소한 공소장을 배제하고 싶긴 했지만, 살이 쪘는지 안 쪘는지로 진실 공방을 치루고 싶지는 않았다. 선배는 다시 내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살. 쪘. 다."

말씨름장의 샅바를 놓기 싫었던걸까. 그녀는 내가 놓칠 세라 세 음절을 또박또박 말해주고 화장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곧장, 무심하게 툭, 멈추지도 않고 뒤통수로 말했다.


"앞으로 말조심할게요."




나는 그녀가 두렵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변화였다. 복직하지 않았다면 미처 몰랐을 것이다. 나는 바라는 것 없이 떳떳함을 위해 싸워 봤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를 내서 고함쳐 봤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예전에 두려워하던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크게 상처 받지도, 크게 흔들리지도 않는다. 더 이상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괜찮지 않은 것을 말 할 수 있게 되니 오히려 괜찮아진 것들도 있다. 조금 늦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솔직한 내 마음을 말할 수 있다. 지나간 일에 뭘 그렇게 유난떠냐는 말에 아직 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다는 말에는 무서워해서라도 타인은 존중해야 하는 거라고 웃어 넘길 수 있다. 침묵하지 않았던 나의 지나간 시간들을 비밀스럽게 추궁하는 이에게는, 되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문할 수도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괜찮지 않은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여전히 남겨진 과제가 있긴 하다. 바로 직장 내에서 훼손된 연결감을 회복하는 일이다. 나는 인간들이 자신의 자그마한 이익을 위해 큰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의 존재감에 위협이 되면 계획적으로 음해하거나, 조직적으로 맹공을 펼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편을 늘려 나가며 세력을 과시하고 그 세력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크고 작은 부당함은 눈감아줘야 한다는 것도,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약한 개인이 어떤 피해를 입는다 하더라도 그건 그들 개인의 문제로 남겨질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 사실들을 인식하고 있는 이 순간, 인간을 신뢰하기란 쉽지 않다. 단절된 골방에 홀로 갇힌듯, 마음이 헛헛하다. 사람을 믿지 않는 다는 건 일견 쿨하고 성숙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어리숙하고 불행한 일이다. 인간은 타인과 진솔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신뢰감으로 행복의 주춧돌을 쌓는 존재다. 주춧돌 없이 지은 모래성 같은 행복은 고층 빌딩 옥상에서 그네를 타면서 추락을 모면하는 기쁨과도 같다.

앞으로 1년, 조직 안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조직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그때 돼서는 또 다른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희망 없는 곳에서 목표도 없이 의미도 없이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인생을 낭비하는 짓이다. 고통은 고통일 뿐, 의미없는 고통을 견딘다고 해서 인생이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


복직 후 지금까지는 꽤나 잘 돼가고 있다. 내가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사무실을 쾌적하게 유지하는 데 정성을 쏟는다. 고생하는 팀원들을 위해 가습기도 새로 들이고, 핫팩과 눈 찜질 팩과 따뜻한 차도 갖다 놓았다. 가난하고 병든 민원인들이 찾아올 때면 더 친절하고 더 세심하게 설명해 드린다. 내가 한 개를 못해주면 다른 두 개라도 해주자는 마음으로 대신 관공서에 전화해 물어봐 주고, 중구난방인 내용을 정리도 해드린다. 나는 세상에 숨어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그래서 버리지도 못하고 챙기지도 못하면서 내 팔자대로 산다.

하하호호 웃고 떠들면서 스쳐 지나가는 그들을 볼 때면 슬쩍 울적하고 주눅 들기도 하지만, 그럴 때면 당당히 어깨를 한 번 더 펴고 내 곁의 사람들에게 한 번 더 호의를 베푼다. 말없이 뛰어다니느라 신발이 닳고 옷이 해진 우리 팀원들을 위해 향기 나는 방향제와 시원한 커피라도 한 번 더 대접한다.

가끔 그들의 승진이 배알이 꼴릴 때면, 아주 잠시 혼술로 나를 달래고는, 숙취에 후회하며 더 나은 방법을 찾는다. 매일 출근하는 길, 기차역에서 잠들어 있는 노숙자 할아버지에게 핫팩과 마스크를 건넨다. 7시 30분, 시장 길바닥에 스티로폼 박스만 놓고 앉아 시락국과 비빔밥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핫팩을 건넨다. 빨갛게 언 손으로 그 옆에서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에게도 핫팩을 건넨다. 내 기분 좋자고 핫팩을 나누고 돌아서는데 비빔밥 아주머니가 밥이나 한 술 뜨고 가라며 뒤에서 나를 부른다.


사람 사는 게 별 게 없다.


비빔밥 한 술이 술 한 잔보다 나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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