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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ChoiceIsMine Oct 31. 2022

[라오스 일상] 평범한 사람이 살아가는 법

라오스로 오기로 결정이 되고, 그럼 이 나라에서 나는 뭘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간 힘겹게 쌓았던 경력은 이곳에 오면서 영점으로 세팅되고 나는 다시 경단녀가 된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 

공부가 깊어질 무렵, '여기서 더 하면 길이 보이겠구나' 하는 찰나 남편 따라 외국으로 가게 되었고

돌아와 아이들 좀 키우다가 아이들이 유치원 들어가서 '이젠 일할 때야!' 하며 찾은, 

집에서 가까운 직장에서 관리직으로 자리 잡아갈 때 또 다른 나라로 가게 되었다.


내가 언제 이런 나라들에서 살아보겠어... 

라며 감사한 마음이지만, 

마음 한편에 나의 커리어가 계속 중간에서 길을 잃는 것만 같아 속상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올여름 한 곳에 면접을 본 후, 재택으로 몇 나라들의 정책을 비교하는 5개월짜리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처음에 이 일을 하기로 했던 것은 라오스로 가서 일을 구하기 전까지 시간을 벌자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생각보다 페이가 좋고,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없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보통 업무를 시작하면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하는 지시사항이 있기 마련인데, 

별로 없는 것이다. 

얼마나 없는고 하니, 처음에 조사를 해서 보내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몰라서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하고 물어봤더니,

나와 같은 포지션으로 채용된 다른 분의 보고서를 보내주면서 "참고해주세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한다.


그런데 잘했다, 이 분.

조사 내용의 핵심만을 간결하게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무엇보다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떨어지는 

깔끔한 편집 기술이 도드라진다. 

이 분은 나보다 스펙도 좋고 비슷한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해 보셨단다. 

업무 설명을 듣기 위해 만난 날도 이미 업무 파악이 다 된 후에야 나올 법한 질문들을 던지셨고, 

"많이 해보셨으니까 잘 아실 거예요"로 책임자의 대답이 시작되었다.


보고서를 몇 번 보내고 나서도 내 보고서에 대한 피드백이 없어 

'아, 나는 버리는 패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가타부타 말도 없고 그냥 몇 달 쓰다가 말려고 하는구나...'

라는 방향으로 생각이 기울고 슬슬 초조해지고 위축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나라의 조사를 마치면 내 마음대로 

다음 나라를 정해 "다음에는 이 나라를 조사하겠습니다", 

" 이 부분이 부족한 듯 하니 이 부분을 더 보완하겠습니다" 하며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하였다. 


시간이 흘러 이 프로젝트의 계약 기간이 끝날 무렵이다.

 그런데 이 업무만큼 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고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쌓인 업무 노하우를 그냥 버리기가 아깝다. 

혼자서 외롭게 컴퓨터만 부여잡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 단디 차려야 한다는 단점만 견딘다면 말이다.

 계약 연장이 될 지에 대해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스을쩍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관둬, 니가 잘하면 그쪽에서 알아서 계약 연장하자고 먼저 연락해"한다.

언뜻 맞는 말이다.

그래서 기다렸다.

...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든다.

너 같은 사람들은 계약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 계약합시다" 하고 먼저 연락을 주겠지.
그런데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잘해도 못해도 비슷비슷해서
먼저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이런 요구사항이 있는지 조차 몰라. 

그래서 지난 금요일에 [계약 연장에 대한 문의]라는 제목으로 책임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내가 최근에 읽은 Grit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좀 오글거렸으려나?...;;; 

그래도 내가 브런치 작가로서 어느 정도의 문학적인 역량은 보여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오늘, 내년 1월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니 다시 합류하라는 이메일을 받았다. 

너무 좋은 조건이다. 아이가 겨울 방학을 맞아 오면 아이와 여행을 다니며, 

라오스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책임자로부터 또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마침 옆 팀에서 12월 말까지 하는 단기 프로젝트가 있어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뭐 이것도 괜찮다. 방비엥 하고 루앙프라방 호텔에서 일하면 되지, 뭐.



계약서에 싸인하기 전 까지는 이 이메일이 아무 효력이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오늘 저녁은 라오 비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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