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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ChoiceIsMine Sep 27. 2022

[외국 생활] 외국생활에 대한 자세

Just Be There

약 15년 전 유치원생 딸과 기저귀 차는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와  멕시코를 거쳐 페루를 가게 되었다. 미국에서 경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인데 당시 미국 비자받기가 쉽지 않아 경로를 그리 짠 것 같다. 아들은 순한 편인데도 비행기에서 울어재꼈고 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우는 아이를 업고 비행기 복도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느라 녹초가 되었다. 캐나다에서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멕시코에 다다를 때 즈음에는 아이가 열이 펄펄 나서 멕시코  공항에서 해열제를 사 먹이고 그 당시는 거금을 들여 트랜짓 4시간을 위해 공항 내 호텔을 예약했고 비싼 호텔에서 아들은 내리 잠을 잤고 우리는 가지고 간 누룽지를 끓여먹은 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리마에 도착했을 때 정말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안 오고 싶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페루에서 산 3년 동안은 한국을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고

페루를 떠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갈 일이 안 생긴다.


당시 우리보다 먼저 페루에 살다 온 선임자가 조언했었다. 

뭘 거창하게 하겠다는 생각 말고 Just be there. 그냥 그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다오면 되는 거라고.


나는 그때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다.


바쁘게 목표를 향해 달리고, 돈을 모아야 하고, 아이들 대학 성공은 어릴 때부터 시작이니 영어니, 방문 선생님이니... 결혼하고 어른이 되었으니 어른 노릇도 해야 하고 시댁에 집안 대소사에...

하는 한국인의 삶은 페루에는 없었다.

정말 놀랐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구나....

그들은 돈을 모으지 않았고 조금 벌어서 쓰면서 그 하루를 즐겼다. 

은행이든 어디든 업무처리 속도가 너무 늦어 속이 터지지만 문제 되지 않았고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소리를 질러대는 한국사람이 문제였다.

그들은 배가 뿔뚝 나오고 살들이 두 겹 세 겹으로 접혀도 배가 다 보이는 끈 나시를 입고 다녔다.

그때 내가 영어를 배웠던 것도 큰 소득이다 스페인어 쓰는 나라에서 웬 영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중학교 1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 때까지 10년 이상 영어를 배웠음에도 외국사람만 보면 "Hello, My name is OOO" 한 마디 후에는 뒤로 숨기에 바빴던 내가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길래 삐우라의 대학교 1학년 교양영어수업반에 들어가 풋풋한 대학생들과 함께 영어를 배웠다. 이곳은 지방대학이라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고, 영어는 그들도 외국어고 나도 외국어인 것은 매한가지이니 그냥 마음이 편했다. 

그때부터 천천히 영어는 내가 굳이 피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언어가 되었다. 


페루는 바닷가면 바닷가, 사막이면 사막, 산지면 산지 모두 음식이 다르고 자연이 다르고 사람들 피부색에 옷까지도 달라 한 나라 안에서 여행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였고 짧은 여행이면 알 수 없었을 나라 구석구석을 3년을 살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자유롭게 살았기에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적응 못할 거라 여겼지만, 페루 아이들처럼 스페인어를 구사하던 두 녀석은 한국에 온 지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스페인어를 잊어버리는 듯했고, 어떻게든 잊는 것을 막아보려 스페인어를 사용하면 한국어가 아닌 그런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어른인 우리도 금방 적응하여 바쁜 서울 사람으로의 본분을 다하며, 학교 엄마들과 모임하고 안 가려는 아이를 끌고 학교와 학원에 보내고 회사도 다니면서... 그렇게 살았다.


남편이 다시 우즈베키스탄에 지원했을 때, 도대체 그 좋은 회사 왜 그만두냐니까 한 5년하니까 이제 재미가 없단다. 재미가 있어서 회사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따라가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후 한동안 많이 우울했다. 이 당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고, 윗 분들도 나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였고 나의 업무역량도 쑥쑥 발전하는 듯하였는데 다시 경단녀가 된 것이다. 말도 안 통하지 뭐가 어디인지 몰라 어디를 갈 수도 없지, 모르는 게 많으니 그나마 남편한테 얘기하면 남편도 매한가지인 상태에서 자기에게 기대기만 하니 힘들고 둘 다 힘드니 싸우게 되고... 뭐 그랬다. 

그럼 난 뭘 할 수 있을까... 하다가 아이들 학교가 국제학교이니 학부모 활동을 열심히 하여 사람도 사귀고 영어를 늘리는 기회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학부모 활동을 열심히 했던 거 같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했으려나?... 어떤 분들에게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는 상황처럼 보였으려나... 그랬던 것 같다.


우즈베키스탄 산 지 한 일 년이 지나니 이제 좀 생활이 쉬워지고 언어도 익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치안이 좋고 한국사람들에 대한 인식도 좋고 한국 교민들도 많아 생활하기 좋은 나라가 우즈베키스탄이지만 그리 버라이어티 한 나라는 아니었고 첫째 입시에 신경 쓰느라 어디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열심히 내 일을 찾고 내 일을 했다. 아이는 아이대로 자기 공부하고 나는 내 경력과 발전을 위해 치열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라오스.

라오스라는 나라에 가고 라오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좀 좌절했다. 영어에 스페인어에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러시아말을 했는데 지금은 또 라오스 말을 배워야 한다고?! 라오스 글을 한 번이라도 검색해 본 사람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자가 모두 모두 뱀이 기어가는 것 같은 모양. 이것이 글자가 되고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한글은 얼마나 심플하고 단순한지. 한국어는 변화가 많고 조사에 높임말에 복잡하지만서도 글자 자체는 쉬운데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음가짐이 조금 다르다. 언어를 몰라도, 어디가 어딘지를 몰라도 마음이 조급해지지가 않는다. 그것은 외국생활을 좀 해본 사람으로서의 여유로움이라고 할 수도 있고, 여기저기 살아보니 사는 것 다 비슷해서 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천천히 알아가도 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들을 충분히 느끼면서 천천히 알아가도 늦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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