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장남, 장녀다.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다. 할아버지께 방한 칸을 내어 드리고 여섯 식구는 함께 지냈다. 외할머니는 딸에 집에 가고 싶었지만 사돈이 계셔서 한 번도 오지 못했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집에 오셨다. 집에는 할아버지와 둘 뿐이었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다. 엄마에게 할아버지 식사를 챙겨드리라는 말을 들은지라 식사 준비를 했다.
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깜짝 놀라셨다.
“아이고, 미숙아.”
“음...”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던 나는 눈만 깜빡였다. 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식사를 하셨다.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셨다. 외할머니가 곁으로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을 하신다.
“미숙아, 사돈과 겸상이 뭐노. 할머니 체할 뻔했다. 요 녀석아.”
“할머니 겸상하면 왜 안돼. 모두 사람인데.”
“남녀가 우째 겸상을 하노. 낯 뜨겁고 아주 곤란했다. 요 녀석아.”
가부장제, 남아선호사상이 뼛속 깊이 들어가 있던 1920년생 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어린 소녀의 밥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어른들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의 집에 돌아가실 때까지 오지 않으셨다. 철없던 아이의 배려가 외할머니에게 못내 아쉬움을 남겼다.
외할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 학교가 끝나면 시장으로 달려갔다.
“할머니”
“아이고, 우리 미숙이 왔나”
“오늘도 이렇게 많이 남았네. 이 손녀가 능력 좀 발휘해 볼까.”
외할머니가 웃으신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하교 후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바쁜 부모님은 일찍 집을 나가 밤늦게 서야 돌아오셨다. 사랑에 굶주렸던 난 할머니가 있는 시장이 좋았다. 그곳에 가면 항상 할머니가 있다. 시장은 나에게 안정감을 줬다. 어른들은 나를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를 걱정하는 기특한 아이, 에너지가 넘치는 씩씩한 아이. 시장의 분위기를 바꿔 놓는 아이.
할머니들만 있던 시장 골목에 목청껏 소리치며 장사를 했다.
“오늘 냉이가 너무 좋아요. 저희 할머니가 직접 캐신 거예요. 제가 많이 드릴게요.”
가던 사람은 나의 큰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더 적극적으로 말했다.
“아줌마, 냉이도 맛있고, 달래도 맛있어요. 여기 있는 거 모두 우리 할머니가 손질해 놓아서 집에 가서 바로 요리하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