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미숙 May 18. 2023

한 남자의 설거지 철학

모든 사람은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남자는 한없이 게으른 사람이다. 신기한 점이 한 가지가 있다. 뭔가를 시작하면 딴 사람이 된다.  

일상의 이중적인 면을 갖고 있는 이 사람은 바로 나의 오라버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때는 이보다 더 게으를 수 없다. 발 디딜 틈 없이 자신의 공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대단한 사람이다.


조카가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 공간은 순식간에 다른 공간으로 변신한다. 언제 그렇냐는 듯이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에 알게 된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설거지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오빠는 뷔페 음식을 먹듯 조금씩 덜어서 먹는 것을 지향한다. 반면 나는 어떤가. 같은 음식도 접시에 담았을 때 더 맛있는 것을 알기에 항상 접시를 이용한다. 덕분에 매끼 설거지 양은 어마어마하다.


오랜만에 오빠가 동생 집에 방문했다. 동생의 밥상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한상 가득 음식들이 접시에 담겨 있다.  먹을 때는 좋았다. 이제 설거지를 할 차례다. 식탁을 남편이 정리하는 동안 설거지를 하기 위해 싱크대 앞으로 갔다. 오빠가 조용히 곁으로 다가온다. 순서 없이 기계적으로 하고 있는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던 오빠는 조용히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나오라고 손짓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설거지를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추고 오빠만 슬로모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팔을 걷어 올린다. 싱크대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냄비는 싱크대 밑 수납공간에 넣는다. 마른 그릇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오빠는 빠르게 설거지 양을 스캔했다. 설거지의 양이 제법 많은 것을 파악한 후 쟁반을 하나 더 꺼내서 설거지 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드디어 오빠만의 설거지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모든 그릇을 애벌세척한다.  

두 번째, 세정제를 묻힌 수세미로 골고루 그릇을 닦는다.

세 번째, 큰 그릇부터 헹구기 시작한다. 접시는 접시대로, 국그릇은 국그릇대로, 밥공기는 밥공기대로, 컵은 컵대로 분류한 후 오빠가 정한 위치에 차곡차곡 정리한다.

행주로 주변에 물기를 닦아준다. 싱크대 안의 물기도 깔끔하게 닦는다. 오빠의 설거지 연주가 끝났다.


"오빠 대박이다."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오빠는 나를 보며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표시다.

오빠가 뭔가를 찾고 있다.


"오빠 뭐 필요한 거 있어? 청소 세제 삼총사는 어디 있어?"


"청소 세제 삼총사 그게 뭐야?"


"우리 동생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걸 모르다고?"


이후 오빠의 청소 강의가 시작되었다.


"청소 세제 삼총사는 베이킹 소다, 구연산, 과탄산 수소를 말해. 먼저 베이킹 소다는 물때, 기름때, 냄새 제거에도 효과가 있어. 또 과일을 씻을 때 한 스푼을 물에 희석해서 채소를 씻어주면 껍질째 먹을 수 있지. 구연산은 세척, 소독, 섬유 유연제로 사용이 가능해. 욕실 곰팡이 제거나, 반짝반짝 광을 나게 하는 데는 구연산이 최고야. 과탄산 수소는 더워진 옷을 깨끗하게 만들어주지. 운동화, 크록스 등을 빨기 전에 30분 정도 담가 둔 후 천으로 살살 문지르면 아주 깨끗해지는 마법 가루야."


어쩜 저리도 살림을 잘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람은 잘하는 것이 모두 다르다. 살림에는 통 관심 없는 동생에게 저리도 친절할 수 있을까. 오빠의 청소 강의를 들어서 일까. 벌써부터 집안이 깨끗해지는 기분이다.


오빠는 행주를 과탄산수소에 담갔다. 약 10분쯤 지난 후 행주를 살살 문질렀다. 목욕을 하고 나온 듯 행주는 하얀 얼굴을 자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마음도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빠 이 맛에 설거지하는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손녀와 할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