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미(아름다울 미), 숙(맑을 숙) 1960년, 1970년대 생 이름에 자주 들어가는 글자다. 왜 두 가지를 다 넣었을까.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아빠, 바쁘세요?”
“아니 괜찮아.”
“제 이름은 누가 지었어요.”
“아빠가 지었지.”
“무슨 의미예요?”
“뭐. 아름답게 자라라고 철학관에서 지었지.”
아빠는 기억이 나지 않는 듯 일관성 없는 말만 하셨다.
내 이름의 탄생은 모르겠지만 개명을 하고 싶을 정도로 이름이 싫었다.
첫째, 이름이 너무 흔했다. 중2 때 반에 미숙이가 4명 있었다.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4명이라는 사실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왜 성을 붙이지 않고 항상 이름만 부르실까.
“이번 문제는 미숙이가 나와서 풀어보자.”
어떤 미숙이를 말하는 것일까. 김미숙, 박미숙, 서미숙, 정미숙은 서로를 쳐다보며 난처해했다. 미숙이가 나오지 않자, 교실은 금세 어수선해졌다.
"선생님, 무슨 미숙이요? 김~미숙, 박미숙, 서미숙, 정미숙 누구를 부르실까 궁~금합니다."
친구들은 클레멘타인 음에 맞춰 우리 노래를 불렀다. 선생님은 당황해하며 다시 성까지 붙여 불렀다.
한번은 영문도 모른채 혼났다. 근데 내가 아닌 다른 미숙이었다. 이러니 사춘기 때 이름이 좋을 리 만무하다.
둘째, 이름으로 놀림당하는 게 싫었다. 짓궃은 아이들은 이름 끝에 ‘아’ 자를 붙여서 불렀다. 미숙아 미숙이.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함의 끝판인데 왜 그 말에 반응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까. 미성숙해서다. 평소엔 온화하던 나는 미숙아라는 말이 들리면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 당시 나의 간절한 소망은 온화하고 여성스러운 지혜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었다.
그렇게 싫었던 내 이름. 지금은 어떨까. 보고만 있어도 사랑스럽다. 이름은 나의 정체성이다. 부모가 된 후 아이 이름을 짓기 위해 남편과 한 자 한 자 뜻풀이를 하며 사랑을 담았다. 나의 부모님도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거다. 아름답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면서.
나이 마흔이 넘어 나의 이름을 정의해 본다. 누구나 처음은 미숙하다. 미숙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채워가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내 이름 속에 들어있다. 완전하지 않고 미숙한 내가 좋다. 완전한 것은 담을 것이 적지만 부족하기에 아직도 채울 것이 많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영혼이 아름답고 맑은 사람으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나는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