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egative to Positive Jun 16. 2017

퇴사후 #8 자유에 따르는 대가

인정하는 순간 겨우 시작

나는 자유를 위해 2년여 전 회사를 관뒀다. 그리고 자유에는 엄청난 대가가 따른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회사가 싫었고, 회사에 나가는 게 고통스러웠다. 더 이상 참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극대화됐을 때 회사를 관뒀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선택에는 문제가 있다. 미래에 대한 준비가 없는 상태로 관뒀다는 게 그렇다. 퇴사 초기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SNS를 잘 키워놓은 덕분에 해외여행 도중 곧바로 구매대행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무자본 창업으로 용돈에 여행경비까지 벌었으니 꽤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호주 시드니의 좁다란 쉐어하우스에서 물건을 쌓아놓고 빡세게 발품도 팔았지만 분명 나쁘지 않은 스타트였다.


사는게 쉽지 않더라

6개월의 비자 기간 만료 후 한국에 돌아왔다. 딱히 회사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렵게 얻은 자유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존에 뚫어 놓은 호주 도매처, 그리고 먼저 컨택해 온 호주 도매처로부터 물건을 공급 받아 계속 팔았다. 쇼핑몰도 열고 한국 물건도 팔았다. 먹고는 살았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 쇼핑몰을 통한 창업은 진입장벽이 낮다. 쉽게 말해 쇼핑몰 시장은 ‘무한경쟁’이다. 그나마 내가 초반에 돈을 벌수 있었던 이유는 호주라는 지역적 메리트에 있었다. 원하는 상품은 뭐든 찾아주는 100% 커스터마이징(고객의 요구에 따라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생소한 아이템을 찾아 판매했다. 문제는 이 아이템이라는 게 온라인에 공개된 이상 금방 카피 당한다는 거였다. 지역적 메리트 역시 그 지역에서만 작동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복병도 있었다. 호주 내 한국인 도매업자가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으로 판매 루트를 확장하며 저가로 ‘후려치기’에 나섰다. 경쟁력이 뚝뚝 떨어졌다. 짜기라도 한 듯 악재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결정적으로 돈이 되던 아이템 하나가 문제를 일으켰다. 제품안전협회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파는 물건이 어린이안전특별법에 의해 판매할 수 없는 아이템이며 물건을 하나라도 판매한 이상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는 거였다. 협회로 불려나가 취조(?)를 받았다. 이어 서울특별시 민생경제과에서 실사가 들어왔다. 그리고 과태료 고지서를 보내왔다. 고지서를 받기까지는 약 6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어린이안전특별법의 맹점으로 법리 해석에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이 법은 전안법과 관련이 깊은데 얘기를 꺼내자면 소주 들이켜야 할듯하다. 하여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법 따위로 질질 끌어 준 덕분에 스트레스는 갑절이 됐다. 물건 팔다가 졸지에 ‘범법자’가 됐고 우울증이 생긴 것 같았다. 시측에서는 과태료 부과가 부당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반박을 입증하는 각종 서류와 함께. 나는 고지서가 날아온 그날 즉시 과태료 100만원을 입금했다. 일말의 스트레스도 받고 싶지 않았다. 150만원의 과태료를 조기 납부할 시 100만원으로 감면해준다는 말도 안 되는 ‘선심’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타격은 꽤 컸다. 과태료를 떠나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호러였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이런 일은 쇼핑몰 세계에서 비일비재하단다. 현실이야 어찌됐건 초짜인 나는 참 무기력해졌다. 어느 정도 추측했던 일개 자영업자의 불안한 미래는 현실이 됐다. 처음 운발이 ‘반짝’ 운발임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다르겠지.’ 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이 일이 있고 나는 2달 정도 잠만 잔 거 같다. 눈은 퀭해졌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겐 부정적인 말만 늘어놨다. 그리고 그 친구와는 6개월 정도 연락을 끊었다. 회사에서 찌든 그녀와 나는 근원은 다르지만 부정적 기운을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서로 연락을 안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10곳도 넘게 점을 봤다. 하루는 남양주까지 찾아가 신점을 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단히 미쳤던 거 같다. 지금이라면 그 돈으로 동남아라도 갔을 거다. 보통 신점은 비싸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올해 운세 정말 바닥이다’로 포문을 열었다. 조금은 위안이 됐다. ‘2016년은 원래부터 고통스럽게 디자인 된 해구나. 원래부터 바닥을 기어야 했어.’



회사에 다닐 당시 하루하루가 순간순간이 죽을 것 같았다. 홀로서기를 하고 나서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엄습해 왔다. 모든 것은 내 결정 나에 의해 이뤄졌다. 그런데 나는 작은 스크래치에도 쓰러질듯 휘청거렸다. 다행히 나는 그 당시를 추억다. 그리고 나는 그때가 나의 흑역사이며 내 인생의 바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불안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 인생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고 인간은 끊임없이 경주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느냐의 차이다. 무엇보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걸 잠시 잊었다. 나는 이제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인생은 끝없는 채찍질이 필요하다. 바닥을 쳤으니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만 생각하기로 했다.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했다면 그에 따르는 ‘대가’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 자유로워질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바닥이 진짜 바닥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를 인정하고 시작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후 #7 비교의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