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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경 Jun 05. 2023

일잘러는 OO을 합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나는 정도가 심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타인과의 대화 내용은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동생이 "언니, OO 했던 거 기억 안 나?"라고 물으면, 열의 아홉은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그랬었나?" 머쓱하기 일쑤였다. 남편과 심하게 싸운 날엔 '오늘은 기필코 너와 말하지 않겠다.'라고 마음을 굳게 먹는다. 하지만 금세 그 다짐을 잊고 남편에게 말을 붙였다. 일상에서는 잊어버려도 다시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일에서는 어림없었다. 교수님이나 회사 상사에게 다시 묻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메모하기 시작했다.


 나는 13년 차 프로 메모러다. 잠들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의 할 일'을 적는다. 관리비 입금하기, 요가 1시간과 같은 일상적인 것부터 회의 시간, 보고서 작성하기 등의 업무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대개 시간순으로 나열해서 적어둔다. 하루 계획인 셈이다. 그렇게 할 일을 해낸 후, 기록해 둔 것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중요한 일은 들었을 때 바로 적어두기 때문에 절대 잊지 않는다. 매일 메모하는 것은 하루를 시뮬레이션하는 것과 같았다. 어떻게 일할지 머릿속에 그려져 있으니, 일의 효율도 높아졌다. 부장님은 중요한 일정을 나에게 묻기도 했다. 메모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일잘러'가 되었다.


 3년 전부터는 다이어리 대신 휴대폰의 앱을 사용한다. 육아를 하며 손으로 쓰고 지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의 할 일'을 적고 지우는 행위를 반복했기에 앱으로 메모해도 문제 될 게 없었다. 오히려 휴대폰은 손에서 떼어놓기 어려운 물건이니 간편하게 쓰기 좋았다. 매일 반복하는 일정은 따로 적지 않아도 알아서 입력되었다. 손쉽고 편리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몇 자 되지 않은 글자마저 직접 적지 않으니 내 것 같지 않았다. 정이 가지 않았다. 다시 들여다볼 일도 없었다. 내 손때가 이렇게나 중요한 거였던가. 할 일을 완료하고 밑줄 긋는 맛이 없었다. 기계적으로 쓰고 지울 뿐이었다.


 지난 어버이날, 아이가 선물이라며 어린이집에서 쥐여준 볼펜을 내게 건넸다. '부모님의 찐 팬'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써볼 수 없었다. 볼펜으로 굴러다니는 이면지에 끄적였다. 못생긴 내 글씨를 오랜만에 만났다. 아날로그가 그리워졌다.


 어제는 오랜만에 10년 전 다이어리를 꺼내 보았다. 그 안에는 대충 휘갈겨 쓴 순두부찌개 레시피, 아이언맨 3 영화표와 감상평 2줄, 다이어트한다고 적어 놓은 몸무게(아니, 지금도 다이어트 중인데 적혀있는 숫자가 지금의 내 목표 몸무게다!) 등이 적혀 있었다. 내가 뭘 하고 지냈는지 쭉 훑어보고 나니 잊었던 그때 그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사소한 듯하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낸 것 같아 뿌듯했다. 새삼 손맛이 그리워졌다. 손으로 남긴 기록이 이렇게 추억이 될 줄이야. 직접 글씨로 쓰면 더 잘 기억한다던데 다시 펜을 잡아볼까 싶다. 사각사각. AI도 따라오지 못할, 아날로그 일잘러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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