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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나 Jul 23. 2024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던 시간

  "아... 네... 알겠습니다. "

  물리적으로 짧고, 심리적으로 길었던 진료 시간이 끝났다. 결과를 듣고 돌아서며 도담이와 나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둘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서로 다른 곳을 부지런히 응시했다. 그 순간 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게는 '딩동, 1층입니다.'라는 기계음이 '딩동,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라고 들릴 뿐이었다.

  


  다사다난했다. 도담이 피부의 역사. 아이의 피부가 유독 예민한 건 이미 알았다. 갓난아기 때부터 피부 트러블이 쉴 새 없이 잦았으므로. 그럴 때마다 병원에서는 "아토피'기'가 있네요?"라는 아리까리한 말과 함께 아기가 어리니 보습에 신경 써주라는 조언을 듣곤 했다. 그 '기'라는 한 글자가 주는 여지 때문이었을까. 도담이는 아토피 비스무리한 알레르기가 있을 뿐, 아토피는 아닐 거라고 열심히 부정했다.


  이유식을 할 때도 자주 입가가 붉어졌다. 때론 음식을 먹던 중에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반나절이면 사그라들었지만 밥 주던 어미의 심장은 한나절 이상 쿵쾅대야 했다. 음식을 주던 숟가락을 멈추고 아이를 들쳐 안아 병원에 달려가기를 여러 번. 새로운 음식을 먹이는 게 초보 엄마인 내게 두려운 일이 되었다. 내가 주는 이 음식이 아이에게 보약이 아닌 독이 되면 어쩌나 무서웠다. 병원의 권유로 비교적 어린 나이, 돌즈음 알레르기 피검사를 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놀라웠다. 음식 알러지를 알기 위해 실시한 검사에서 나온 건 뜬금포 '개 알레르기'. 어쨌든 개는 안 사귀면 되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새로운 음식을 먹을 때의 두드러기 역시 일시적인 것일 뿐, 유의미한 반응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특정 음식물에 알러지가 없다는 결과지를 받았을 때, 크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먹여도 되겠다는 생각은 큰 위안이었다. 성장기 아이에게 음식을 가려 먹여야 하는 건 엄마에게 힘들고 걱정스러운 일이니 말이다.

가장 초창기 도담기의 식판식 (두돌 전후)

 한동안 병원을 다니며 피부 면역을 위한 고군분투의 시간을 보냈다. 도담이의 반찬에, 음식에 과몰입하며 영양성분에 아주 민감한 엄마 노릇을 자처했다. 고된 일이었다. 이것저것 편하게 먹이며, "나는 이렇게 쿨하게 아이를 키웁니다."라 하고 싶었지만, 한 번 뒤집어진 피부를 되돌리는 데에는 너무나 많은 노력과 눈물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기에 발을 동동댔다. 그래서였는지, 때가 돼서였는지 5살 무렵의 아이는 여느 아이 이상으로 고운 피부를 가지게 됐다. 어딜 가든 아이 피부가 희고 곱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이었다.


  5살이 되며 새롭게 실체를 드러낸 꽃가루 알레르기와 비염이 5-6월쯤 아이를 힘겹게 했지만 그럭저럭 한 두 달을 잘 넘기면 나머지 열 달은 뽀얗고 보송한 피부였다. 그렇게 여덟, 아홉, 열 살까지. 피부과와 가끔 친하게 지내는, 아토피'기'를 가진 아이의 엄마로 그럭저럭 안착했다. 그 사이 둘째가 태어났고, 다행히 둘째는 알레르기 피부가 아닌 듯했기에 이제 마음을 좀 내려놔도 되겠지,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 버렸다는 게 적절할까.


  11살이 되면서 아이의 피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작은 트러블도 금세 낫지 않고, 밤새 긁어대기 시작했다. 하얗고 보송하던 피부가 거뭇하고 거칠어졌다. 자다 긁어 이불에 피가 묻기도 하고, 엄마 눈을 피해 긁어대다 상처가 나기도 했다. 그걸 가리려 혼자 밴드를 붙이는 모습도 자주 봤다. 급기야 양가의 어른들도 도담이의 피부에 걱정이 넘치게 되었다. 10여 년간 노하우가 쌓일 대로 쌓였다 생각했는데, 피부문제는 내가 박사다 싶었는데 내 나름으로 해 주는 방법이 맥을 못 쓰는 게 아닌가. 뭔가 이상했다.  


  어릴 때라면 당장 병원에 달려갔을 이 상황에서도, 이러다 또 금세 괜찮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감도 있었다. 병원 날짜조차 여유를 부려 예약해 두고 일주일, 2주일. 그 사이 좋아지면 취소해야지. 했던 착각도 했더랬다. 얄팍한 기대를 비웃듯이 차도가 전혀 없다. 아이의 피부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병원을 찾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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