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열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까꿍 반겨주는 그것.
"안타깝지만 3개월 정도는 우리, 좀 더 적극적으로 식단 관리를 해봅시다."
의사 선생님의 말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밀가루, 튀김, 설탕. 그리고 또 뭐 먹이지 말랬더라. 대체 뭘 먹어야 할지, 먹지 말아야 할지 혼돈의 카오스가 몰아치는 가운데 병원문을 나섰다.
"몸에 안 좋은 걸 덜 먹이고 키운 것 같은데... 지금 보다 더요..?"
입술 뒤까지 올라온 질문을 꾹 눌러 삼키고 돌아섰다. 물어 무엇하리.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 일단.' 질문 대신 혼자 결론을 지을 참이다.
병원까지는 우리 집에서 자차로 30여분 거리. 왕복 한 시간. 주차 공간은 협소하고 환자는 넘치는 나름 유명한 병원이다. 뱅글뱅글 주차 공간을 찾아 곤욕을 치렀고, 멀찍이 차를 세우고 걸어가다 보니 비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흥건이다. 장마와 함께 시작된 우리의 병원 진료. 그렇게 오후 진료를 받고 집에 오니 공교롭게도 딱!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 버렸다. 장을 봐올 여력은 없고, 간신히 두 아이와 몸과 멘탈을 붙잡아 귀가했다. 문을 닫고 신발을 벗자 곧장, 가장 무서운 소리가 들린다.
"엄마, 나 너무 배고파."
그렇지. 간식도 먹지 않은 도담이가 배고프겠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점심도 걸렀는데, 허기를 잊었네. 장을 못 봤다. 어쩌지. 급하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때, 헐렁한 냉장실 속 언제나와 같이 그 자리에서 까꿍! 을 해 주는 구원투수가 보인다.
"이런 된장! 역시 믿을 건 너뿐이다. 어쭈, 두부에 쌈채소가 있네. 오늘 너희가 열 일을 좀 해줘야겠어. 밑반찬도 출동 준비하고."
어떤 재료를 넣어도 제 나름의 맛을 만들어주는 된장. 해산물도 채소도 고기도 기꺼이 받아주는 된장. 멀겋게 끓여도 자작하게 끓여도 제 맛을 뽐내는 녀석이다. 주부의 구원투수. 이리저리 뒤적여 감자, 버섯, 양파, 호박의 자투리들을 찾았다. 숭덩숭덩 잘라 보글보글 끓여낸다. 도담이가 좋아하는 쌈채소도 조금 꺼내 들었다.
시장이 반찬이었는지, 정말 맛이 있었는지 도담이는 밥 두 공기를 뚝딱 비웠다. 형아의 식단을 따라 얼결에 쌈채소에 입문한 3살 도동이도 맛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지친 마음을 잊고 잠시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됐지. 못 먹을 것보다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재료가 훨씬 많을 거야. 용기를 가지고 가보자. 배고플 땐 이렇게 한 번 외쳐보고, "이런 된장! 밥상을 도와줘."
맛있게 먹고 행복하면 뭐다? off_top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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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 알러지가 없는 아토피 아이의 밥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