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찜한 반찬.
아토피라는 녀석의 성질을 보아하니, 영화 속 숨은 악역에 비유하면 딱이겠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주인공의 옆에 물처럼, 그림자처럼 함께 하다 어느 순간 뒤돌아서며 비수를 꽂는 빌런. 이게 아토피 본연의 성질머리임을 깨닫는 중이다. 병원에서 도담이의 피부 상태가 좋아져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되겠다는 소견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날은 아토피 식단에서 금방 벗어날 것만 같았다. 내 안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며칠 뒤에 다시 붉어진 아이의 다리. 좁쌀처럼 빌런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간지럽다고 상처부위를 긁어댄 아이에게 쓴소리를 하고 나니 내 마음도 잿물을 마신 것 같다.
또 이대로 실의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다. 아이는 밀가루 0%의 생활이 더 길어질 것에 슬퍼하고 있고, 대체식의 즐거움이 필요하다. 재료에 강박적인 제한을 두지 않아야겠다. 재료 자체보다는 조리법에 살짝 변화를 주기로 한다. 당독소 수치가 꽤 높게 나왔던 민이에게는 굽고, 볶는 조리법보다는 삶고 찌는 게 득일 테니. 민이가 좋아하지 않는 재료로 찜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아토피 식단은 매운 음식을 피해야 하기에, 세 살 동생도 함께 맛있을 수 있겠다.
1. 된장마늘무수분수육
보쌈을 좋아하고, 요리를 즐기지만 왜 집에서 수육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을까. 역시 고난과 결핍은 인간을 성장시킨다. 굽지 말라하니 조금 더 맛있게, 다양하게 먹을거리를 찾게 된다. 주부 레벨이 살짝 상승되는 기분이다. 수육용 고기를 길쭉하게 한 덩이 사 와서 한참을 노려봤다. 물에 삶아? 쪄? 오케이. 냉장고에 있는 배추와 양파도 소진할 겸 무수분 수육으로 낙찰이다. 배추와 양파를 융단처럼 깔고, 핏물을 뺀 고기를 넣고 된장마사지를 시작한다. 부드럽게, 고르게 문질문질. 마치 아끼는 돼지 얼굴에 머드마사지를 해주는 심정으로 펴 발랐다. 빠질 수 없는 마늘도 한 움큼 넣어준다. 이제는 냄비 속 녀석들이 할 일만 남았다. 한 번씩 뒤적여주며 기다리면 끝이다. 예상보다 더 맛있는 수육이 완성됐다. 역시 뭐든 시도하기 전에는 모를 일이다.
2. 소고기를 품은 가지.
상대가 좋아하지 않는 재료를 요리조리 만들어서 줬을 때, '어라? 맛있네?' 싹싹 긁어먹는 모습으로 결말이 나면, 주방장은 한없이 기쁘다. 내게 이런 도전의지를 불사르게 하는 것이 바로 가지다. 동그리도 아이들도 가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대체 가지를 왜 싫어하는 걸까. 이 맛있는 걸.
2-1. 가지의 꽃이 피었습니다.
물컹하고 크게 특이할만한 맛이 없단다. 가지를 좋아하는 엄마 덕에 나도 가지러버가 됐듯 아이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로 한다. 불고기거리가 냉동실에 있길래 적당히 해동해 가지에 돌돌 말아줬다. 찜기에 넣어 15분 남짓으로 쪄내니 접시에 가지꽃이 핀다. 휘뚜루마뚜루 쓰기 좋은 간장소스도 곁들이니 꽤 그럴싸한 한 끼가 완성됐다. 아이들도 동그리도 연신 “으음~” 소리를 내며 먹었으니 주방장은 만족이다.
2-2. 라자냐는 가지자냐.
라자냐를 좋아하는 도담이. 주재료가 가지인 줄도 모르자냐 같으니. 최대한 첨가물이 적은 짝퉁 라자냐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켜켜이 쌓아 올릴 정성은 없고, 그저 칼집을 내 가지 속에 넣고 채소를 다져 볶아 소스 흉내를 내 봤다. 접시에 담아 “짜잔! 너만을 위한 라자냐야!” 했더니 금세 믿고 “우와!” 한다. 가지를 어찌나 잘 먹는지 한 접시 뚝딱에 소스는 밥에 비벼 흡입한다. 가지자냐도 꽤 성공.
요리에 대해 발끝치도 모르지만, 분명한 한 가지. 가보지 않은 길, 해보지 않은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식구들이 안 먹고, 실패하면 어떤가.
내가 다 먹으면 되지! 그러면 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