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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나 Nov 30. 2023

개운죽 키우는 여자

소중한 인연을 죽일 순 없어

 아이가 학교에서 키우던 개운죽을 가지고 왔다. 페트병을 잘라 만든 통에 담긴 녀석이었다. 그 안에 소박하기 짝이 없는 잎을 두 어 줄기 대롱대롱 달고 왔다. 양파 뿌리보다 가늘어 보이는 개운죽의 잔뿌리를 보니 이게 과연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가늠이 안 된다. 분명한 건 CPR 상태로 우리 집에 입주했다는 사실이다.  

    

 순간 식물 트라우마가 살아났다. 신혼 때 호기롭게 코스트코에서 데려온 스투키. 공기 정화에 좋다기에 신이 나서 낑낑 끌고 와 거실에 입주시켰다. ‘아직 거기에 네가 있었구나.’ 싶을 때 물을 줬다. 그러면 또 그런대로 동거하던 기특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물 주기를 잊어도 너무 잊었는지 스투키 녀석은 우리 집이 아닌 자연으로 돌아가 버렸다. 산 것을 데려와 안 산 것으로 돌려보내는 이 씁쓸한 기분. 덕분에 식물을 키우는 건 덜컥 부담이 되어 버렸다. 식물에게 못할 짓 같았으므로.      

 아이 키우는 것만도 벅차서 다른 생명체는 들이지 않겠노라 다짐을 했는데, 페트병을 타고 온 이 개운죽 난민을 내칠 수는 없었다. 도담이는 개운죽을 애지중지 들고 오더니, 이내 던져 놓고 잊어버린다. 유치원에서 받아 왔던 물고기도 그러했고, 친구에게 받아온 마리모(이끼)도 그랬다. 네가 데려와 내가 키우는 이 악순환의 고리는 개운죽까지만 했으면 해.     

 

개운죽, 개운하게 죽을 순 없어.
내가 널 살릴 테다.
 

 인터넷에 '개운죽 키우기'를 검색한다. 오구오구 이렇게 튼튼하게도 자랄 수 있구나. 우리 집에 있는 저 녀석의 상태가 더 가소로워진다. 갑자기 개운죽 육아에 의지가 불탔다. 기사회생의 아이콘으로 키워주마. 물을 갈아주고, 볕이 좋은 곳에 뒀다가 그늘진 곳에 뒀다가를 주기적으로 반복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갈아주면 되는 물도 3~4일에 한 번씩 갈아주며 바라봐주고, "잘 커보자." 말도 건네봤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나니 잎에 윤이 나기 시작한다. 지나가며 잎도 한 번씩 만져주고, 지긋이 쳐다도 봐주며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던 그 녀석이 생물임을 입증한 것이 행복했다. 하지만 꼬리를 흔들지도, 왕왕 짖지도 않는 식물의 양육은 역시 나와는 거리가 멀었던 걸까. 관심이 오래갈 리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물갈이가 뜸해졌고, 부엌의 창 구석 자리로 밀려나 있다가 이내 관심 밖에 놓이고 말았다.

사진:pixabay

 그러다 개운죽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날 부엌 청소를 하다 구석에 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이를 어쩌나 잎이 노랗고 시들어 빠졌다. 그 와중에도 이게 중환자 상태인지 이미 요단강을 건너버린 건지 판단이 안 선다. 정말 식. 알. 못이다. 수혈하듯 물을 갈아주고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몇 차례 해서인지 개운죽은 다시 일반실 환자쯤의 상태로 생을 이어가고 있다. 없었다면 모를까, 이미 시작된 식물과의 인연은 이렇게 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식물을 키우며 인연에 대해 배우는 순간이다.     


 식물을 키우다 사람 간의 관계를 떠올렸다면 비약일까. 인간관계란 마치 살아 있는 식물 같다. 그저 그 자리에 있지만 실은 관계마다 필요로 하는 온도와 습도가 다르다. 관계마다 대하는 방법도 달라야 하니 식물 키우기와 꽤 닮은 구석이 많다. 처음 만남의 씨앗을 가지면 싹을 틔우고, 새로운 우정의 줄기를 만들어갈 때 우리는 갖은 정성을 들이고, 좋은 흙을 고르느라 야단이다. 그러다 어느 정도 관계의 뿌리를 내렸다 싶으면 곧바로 관심이 반감하고 그저 놓아두는 건 아닌지. 친구의 우정이, 가족의 사랑이, 자녀와의 유대가 그저 거기 두어도, 조금 건조해도 잘 살아 파릇할 거라 착각하는 건 아닌지. 사막에 선인장을 놓아두는 마음이 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사진:pixabay

 나이 들수록 인간관계에 들이는 정성을 내려놓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많이 한다. 새로운 관계보다 익숙한 관계가 편하다는 말도 버릇처럼 했다. 관계에 힘을 빼는 게 속 편하다는 말은 사실 좀 위험한 발상이다. 빛이 바랜 우정은 꽃보다 시들기 쉽기 때문이다. 가장 정성을 들여야 하는 관계는 정작 편안한 사이, 그냥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이다.

     

 무심히 전화하는 걸 좋아한다. 의도나 목적이 없이 나누는 대화가 사실은 가장 맛있다.  “그냥 생각나서 전화해 봤지!”라는 말이 반가운 이유다. 별일 없이 거는 전화가 사실 제일 고마운 것 아닐까. 이 사람이 나와의 관계에 물을 주고, 관심을 두고 있구나. 정성을 다하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 때 관계의 생명력을 느낀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 어떤 관계에 물을 주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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