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멀리스트로 불러주시겠어요?

짝퉁 미니멀리스트의 고백

by 이효나

"당신이 X자로 팔짱을 끼고 아일랜드 식탁에 서서 집을 한 바퀴 휘- 둘러볼 때가 나는 제일 두려워."


우리 집 동글씨가 했던 말이다. 마음이 심란할 때 미친 듯이 정리를 하는 나의 습관을 꼬집은 표현이다. 그렇다. 정리는 나를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일임과 동시에 내게 가장 힐링을 주는 일이다. 나는 정리를 사랑하는 소위, 정리피플이다. 어릴 때는 책상 위가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으면 공부가 안 됐고, 기분이 울적하면 엄마 옷장까지 뒤집어 정리하는 나였다.


지금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유튜브를 켜고 '미니멀리스트, 정리, 수납, 살림' 같은 키워드를 쳐보는 것이 1번으로 하는 일이다. 아이들이 열이 나거나 아파서 열보초를 서야 하는 날이면 어차피 못 자는 거 정리나 하자 싶어 서랍장을 뒤지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신랑은 스스로를 고단하게 만드는 나의 습관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깨끗해진 집을 보면 싫지 않은 모양이다. 이정도면 나는 미니멀리스트일까.


(사진: PIXABAY)

요즘의 살림은 '미니멀 대 맥시멀'의 대결 같다. 미니멀리스트의 비움과 맥시멀리스트의 수납력 사이 어디쯤에 줄을 서야하는 기분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손가락을 딸깍 하면 지저분한 물건들이 10배속으로 샤샤샤샥 비워지는 영상이 넘쳐난다. 정신을 놓고 보면 카타르시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 저게 살림이지! 쌍따봉이다. 거실에 널브러진 수많은 물건들이 순식간에 어디로 숨겨지고 깨끗해진 장면을 보노라면 마치 말갛게 세수를 한 느낌마저 든다. 정리의 달인, 멋진 황새님들에게 박수를.


이 세상에는 살림고수가 어쩜 그리 많은지, 그 능력치를 보자면 역시 정리도 재능임을 확인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와. 애 셋인데 저렇게 깔끔하다고? 옷장 정리를 저렇게도 하는구나.' 입을 아- 벌리고 보다가 따라 하고 싶은 방법은 얼른 메모해 둔다. 정리를 하려면 필연적으로 비움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수시로 정리할 게 없나 둘러보고, 비워 내는 나의 습관을 공감받는 기분이다. 오케이, 역시 내 취향은 미니멀 쪽이었어!


나: 여보, 나 말이지. 이제부터 미니멀리스트라고 불러줘. 역시 나는 그쪽이었다니까!

동글: 아닌데, 당신 미니멀 쪽 아니야. 미니멀하고는 좀 거리가 멀지.

나: 엉? 왜 그렇게 생각해?

동글: 미니멀리스트는 확 비워내고 안 채우는 거 아니야? 당신은 잘 비우고, 정리를 잘한 뒤에 , 또 잘 채우잖아.


두둥. 웃으면서 뼈 맞았다. 나에게는 비움의 DNA 못잖게 채움의 재능도 대단하다는 걸 망각했구나. 나에게는 정리만이 힐링이 아니었음을 상기했다. 나에게 있어 다이소는 방앗간이고, 이케아는 월간행사 같은 곳이다. 왠지 월말에는 한 번 들러줘야 할 것 같은 장소. 냉장고를 열어보고 정리된 모습에 흐뭇하다가 ' 너무 휑하네. 마트 가서 장 봐야겠다.' 작아진 아이들 옷을 과감히 정리한 뒤에 흐뭇하게 바라보다 '휑하네, 애들 옷 좀 사야겠다.' 이것이 곧 내 의식의 흐름 되시겠다. 결국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는 슬픈 운명의 사람, 나는 뱁새였어.


그러나 좌절은 금지다. 인생에는 미니멀과 맥시멀의 양극단만 있는 건 아니니까. 사실 우리 살림은 그 둘의 수직선 위 어디쯤에 있지 않나. 원래 외골수는 인간미가 없지. 사람들은 잘 먹는데 날씬한 사람을 좋아하고, 여유 시간 많으면서 돈 많은 삶을 꿈꾸잖아. 살림의 트렌드도 결국 돌고 돈다. 나는야, 살림계의 콜럼버스. 미지의 신대륙을 발견하리라.


나는 그럼 미미멀리스트로 하겠어.

미미멀리스트. 미니멀리스트를 꿈꾸지만 현실은 미미한 정리를 거듭하며 살아가는 중간층의 살림꾼을 일컫는 말. 물론 사전에 없는 말이다. 이렇게 또 콩글리시를 생산해 본다. 세종대왕님 죄송합니다. 원래가 말장난을 즐기는 사람인지라 국어의 오염을 감수하고, 나리 신조어를 살짝 던져 봅니다.


(사진:PIXABAY)

미미멀리스트에는 몇 가지 중요한 자격요건이 있다.

1) 궁극적으로는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한다.

2) 정리정돈에 애매한 재능을 가졌다.

3) 비워진 서랍장을 보면 뭔가 사고 싶어 진다.

4) 정리는 정리용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5) 정리를 하지만, 집이 그닥 휑해지지 않는다.


이참에 나의 살림살이를 한 번 점검해 보기로 한다. 내가 왜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는지, 그럼에도 왜 미미한 정리를 끊임없이 하는지 말이다. 살림하는 우리네 엄마들 대부분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열심히 청소를 하고 돌아섰는데, 놀라울 정도로 미미한 변화뿐이라 흘린 땀방울이 측은해진다면, 미미멀리스트로서의 자격은 이미 충분하다. 이제 미미멀리스트의 살림수첩을 한 챕터씩 펼쳐보자. 정리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려니 벌써 설레는 이 마음. 감출 길이 없다. 다음 글은 동글씨가 가장 두려워하는 '물건 비움'에 관한 이야기라는 소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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