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정리, 저는 이렇게 합니다만

미미한 살림쟁이의 자기 점검

by 이효나

너 왜 그랬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지난주 글 말미에 호기롭게 ‘다음 주는 냉장고 편이랍니다!’ 입을 떼버린 나 자신을 마음껏 꾸중한 일주일이다. 누구도 보여달라 한 적 없는 나의 냉장고를 이렇게 활짝 열어젖힌단 말인가. 주부 업무의 최전방, 그중에서도 냉장고는 주부의 무기고나 다름없다. 그래서 쉬이 오픈할 수 없는 비밀스런 장소랄까! 냉장고문을 활짝 연다는 것은 뭔가 민낯을 보이는 것 같아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자고로 한 번 뱉은 말은 지켜야지. ‘낙장불입, 유턴금지’ 내 생활 모토 아니겠나. 그리고 큰 결심 한 가지. 글을 위한 인위적이고 대대적인 정리는 하지 말자 다짐했다. 최대한 사는 모습대로.

3개월 전 셀프 리폼한 냉장고. 효브제.

그래! 열어보자. 짜라라라란. 냉장고를 활짝 열었다. 11년 차 내 친구. 성능은 쌩쌩한데 실버 색상이 슬슬 마음에 들지 않아 시트지를 사서 리폼했다. 효스포크? 아니다. 엘지니까 ‘효브제’로 하자. 냉장고에 냉기만 쌩쌩이다. 휑하다 못해 궁하다. 무슨 일이지 생각해 보니 한동안 최선을 다해 냉장고 파먹기를 한 결과구나. 거의 새것에 가깝게 비어있다. 장을 보러 마트로 총총 달려갔다. 남성 1,2,3호를 주렁주렁 대동하고 말이다.


물가가 하늘을 찌른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뭘 그리 담았다고 25만 원 돈이 금방이다. 집에 와 장본 것들을 찍어봤다. 대체 뭘 얼마나 샀나. 생필품과 청소도구를 몇 가지 산 금액을 뺀다고 해도 17만 원 정도의 금액이다. 막상 펼쳐놓고 보면 또 별 거 없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몇 가지 빠뜨렸지만 대강 찍은 식품들. 이게 17만원어치라니.

신랑은 입술이 또 씰룩대고, 뭐 이리 많이 샀어?라는 눈빛을 자꾸 보내는 것 같다. 여기 있는 음식 8할은 그 입술에 들어갈 텐데. 할말하않 하겠다.


사실 장보기 물가가 올랐다지만 외식 물가는 더 대단한 것 같다. 치킨 한 마리(에다가 반마리 추가하면) 3만 원도 부족한 이 현실. 눈물 찔끔이다. 짱구를 굴려봤다. 장 보는 것과 시켜 먹는 것의 득실을. 4인 기준으로 일주일을 계산해 보면 그래도 단연 집밥 세 끼가 득이다.


냉장고 정리 이야기 한다더니 왜 물가 이야기만 하느냐. 집밥을 해 먹자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집밥의 핵심은 냉장고이고 말이다. 자 장본 것들 정리 들어간다. 거창하진 않아도 식재료 정리에 꼭 기억하는 원칙 몇 가지가 있다.

웬만하면 장 본 날 바로 소분할 것. 좀 피곤해도!

1. 밀키트를 만드는 마음으로

요리할 때 최대한 식재료 다듬을 일 없게 미리 다듬어둘 것. 특히 마늘, 대파, 쪽파, 풋고추 등은 냉장할 것, 냉동할 것 따로 담아둔다. 번거로운 파프리카도 미리 손질해 두기. 요리할 엄두가 생기고, 시간은 줄어든다.


2. 소분, 소분, 소분만이 내 세상

우리 집에 냉장 냉동 소분 용기가 많은 이유다. 오늘처럼 소분하는 날은 팬트리 본부에 잠자던 밀폐용기 어벤저스가 총출동이라 팬트리가 휑해진다. 그렇다고 모든 걸 다 소분하지는 않는다는 점. 깔끔해 보이기 위해 뜯지도 않은 지퍼백 냉동식품을 굳이 소분하지는 않는다. 냉동식품은 뜯었는데 애매하게 남았을 때만.


3.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가라.

냉장고도 서랍장이나 마찬가지다. 명확한 자기 자리가 있어야 해. 1층은 무거운 김치, 장류, 반찬류. 2층은 식재료 다듬은 것 들이다. 주로 요리재료로 쓰이면서 많이 무겁지 않은 재료들 위주로 둔다. 3층은 가벼운 식재료나 가벼운 용기들 중심으로 둔다. 키가 작아 슬픈 이작가 주부는 3층에 트레이를 둬서 슬픔을 극복한다.


4. 통을 통일한다.

밀폐용기를 세트로 구매하면 정리의 깔끔함이 배가 된다. 그렇다고 마구 사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지금 냉장고에 들어간 밀폐용기의 양이 우리 집에 있는 총량에 가깝다. 유리용기를 사서 주기적으로 패킹만 재구매하면 얼마든지 오래 사용 가능하니 훨씬 경제적이지 않나. 벌써 몇 년째 유리 변색 없이 잘 쓰고 있다. 소분용기는 플라스틱 제품이지만 몇 년째 더 구매하지 않고 잘 사용하는 중이다.


5. 아이의 니즈와 키를 고려하면 엄마가 편하다.

첫째가 6-7살이 되면서부터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늘리게끔 돕고 있다. 아이가 자주 마시는 요구르트, 좋아하는 딸기우유, 잼 등은 아이 손이 닿을 곳에 두고 직접 꺼내 먹도록 한다. 오늘은 음료를 정리하는데 아이 키가 꽤 자랐음을 느끼고, 새삼 세월을 실감했다.

냉동실 팁. 소분하고, 세로 수납하기

6. 별표 다섯 개. 화석 만들지 않기.

이건 정말 중요한 부분. 냉동실에 손을 쓰윽 집어넣으면 어디서 와서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비닐 속에 돌덩이가 있다. 발등에 떨어지면 최소 골절이다 싶은 화석이다. 주로 떡! 바로 떡이 문제다. 냉동실에 넣었다 레인지에 해동해 먹어야지 했던 떡은 시간이 지나면 무시무시한 녀석이 되곤 하니. 화석을 만들지 말고 정리할 것. 만약 화석이 발굴되었다면 과감히 작별을 고할 것.


7. 이것도 별표 많이. 검봉 절대 금지.

냉장고 냉동고의 재료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은 비닐이다. 그중에서도 검은 봉지는 쥐약이다. 한 번 들어가면 뭐가 들었는지 잊기 십상이니. 화석의 길로 가는 거다. 최대한 비닐 사용을 자제하고 투명한 통에 담아 보관하자. 환경과 냉장고를 동시에 살리니까.


8.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부지런히 먹을 것. 우리 집에는 먹깨비 성인 2명, 편식 없는 먹깨비 꿈나무 1명, 그리고 소식좌 아기 1명이 산다. 방학 때는 냉장고 문이 닫힐 새가 없는 느낌. 그래도 덕분에 식재료 로테이션이 빠르고 신선하다. 이거..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무튼, 묵은지와 장을 제외하고는 숙성시키지 말자. 신선한 음식을 섭취하자. 채소류는 딱 2-3일 먹을 만큼만 냉장고를 채우는 것도 방법이다. 부지런히 먹기. 다시 한 번 강조하니 잊지 말 것. 살 걱정은 잠시 넣어두자.


강호동이 강식당에서 눈물 흘리며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내가 뭐시라꼬..“ 그렇다. 내가 이렇게 조언을 공유할 만큼의 수준인가. 고민이 없는바 아니나, 이건 누구를 위해 쓰는 글이라기보다 나 자신을 살리는 글이다. 내 살림을 다시 둘러보고, 움직이게 만든다. 점검하는 시간이 되니, 그 자체면 되었다 싶다.


한 때 화석이 다량 발굴되었던 우리 집 냉장고는 몇 년 전, 나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 이후 상당히 달라졌다.


“나는 왜 신선한 재료를 사서, 굳이 안 신선한 상태로 만들어 가족들과 섭취하는가.”


신선할 때 사서, 신선할 때 먹자.

소분과 냉장고 정리가 집밥의 원동력이 되어준다는 것을 잊지 말고 이번 주말에는 정리 좀 해 보는 것도 좋다.


적당히 사서 부지런히 먹자.

미미하게 소분하며, 정리하는 것.

이것이 먹깨비가 사는 우리 집의 냉장고 유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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