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살림에 대처하는 미미멀리스트의 자세
신혼 전셋집 만기를 채우고 결혼 2년 차에 이 집을 마련했다. 햇수로 9년에 접어드는 정든 나의 집. 이사를 가려는 생각도 해 봤지만 우리 부부의 엉덩이가 무거운 탓인지, 들쑥날쑥한 집값 탓인지 오늘도 우리는 여기에서 지지고 볶는다.
이사를 다니지 않으면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지만, 크나큰 단점이 존재하니 바로 살림살이가 묵어간다는 점이다. 김치가 묵으면 맛이 쌓이지만 살림은 묵으면 먼지가 쌓인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주방의 소소한 살림은 금세 늘어간다. 빨대와 나무젓가락은 우리 집 주방 어딘가에 알을 낳는 건지, 서랍마다 불쑥 나오기 일쑤다. 주기적으로 비우고, 부지런히 정리하는 것만이 묵은 살림에 대처하는 슬기로운 마인드 아니겠는가.
오늘은 주방 팬트리와 수납장을 점검해 보기로 했다. 정리가 시작되자 늘 그랬듯 동글씨는 화장실로 도망을 가고, 나의 두뇌는 홀로 풀가동되기 시작이다. 대단한 노하우는 없다. 그저 잔머리와 꾀에 의존하는 한 명의 미미멀리스트가 있을 뿐이다.
1) 공간은 이름 짓기 나름이다.
김치냉장고를 사지 않았다. 냉장고 용량이 적지 않았고, 김치 냉장고까지 꽉꽉 채울 일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친정이 멀지 않은 곳이라 김치를 한 통씩 가져다 먹는 게 이제는 익숙해졌다. 새 김치와 묵은지를 한 통씩만 넣어 둬도 우리 식구의 살림에 크게 불편이 없었다.
리모델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김치냉장고 자리는 그냥 문 달린 창고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하다 몇 년 전 조립식 수납선반을 두 개 사서 넣고, 그 안을 팬트리로 활용했다. 가끔 두 아이의 숨바꼭질 장소로 활용된다는 건 비밀이다.
2) 숨긴다, 찾기 쉽게
김치냉장고 자리여서 콘센트가 있다는 장점. 이 걸 놓칠 수는 없었다. 자잘한 소형 가전들을 그 안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만 이용한다. 특히 전자레인지와 토스트기는 팬트리에서 꺼내지 않고 바로 사용 가능하니 더없이 편리하다. 문을 닫아두면 아기 손에 닿지 않는다는 것 또한 큰 장점이다.
3) 정리에 빠질 수 없는 북스탠드
정리의 구역을 나눌 때 유용하다. 아무래도 그냥 쌓는 것보다는 더 단정하게 정렬이 된달까. 곡류를 눕혀서 보관할 때도 북스탠드를 이용하면 보다 안정감 있게 사용 가능하다. 주방, 옷장, 책상 정리에 절대 빠지지 않는 애정의 장비다.
4)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물건의 양을 관리한다.
텀블러는 미니멀리스트로 가는 길에 만나는 지뢰다. 세상에는 왜 그리 탐나는 텀블러가 많은지. 한 때는 찬장 가득 텀블러가 있었다. 여행 가서 산 것, 선물 받은 것, 예뻐서 산 것, 사은품 받은 것까지. 수납장 문을 열 때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쓰지 않을 거면서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못하는 내 마음이 미련하고 애처로웠다.
과감히 정리했다. 새것은 나눠주고, 오래된 건 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기준을 정했다. ‘모든 물병의 합이 이 바구니를 넘지 않을 것’ 그 뒤로 몇 년째 잘 지켜지고 있다. 하나를 버려야 새것을 구입하는 식으로 총량을 조절한다. 일회용품 줄이자고 사용하는 텀블러를 종이컵처럼 여기지 않아야겠다 다짐했다. 몇 년은 거뜬히 사용하는 녀석들이다.
5) 애증의 밀폐용기 수납
밀폐용기는 적어도 많아도 문제다. 정리 방법도 다양해서 문제다. 우선 우리 집에 필요한 밀폐용기의 종류와 수량을 정해야 한다. 우리 집의 경우는 채소와 고기를 소분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냉장 냉동 소분 용기를 넉넉하게 구입했다. 그리고 유리용기를 선호하기에 소재를 통일하려 애쓰는 편이다. 같은 종류, 비슷한 색상으로 구매하면 뚜껑을 찾아 헤매는 일이 없어 관리가 쉽고 정리도 쉽다. 뚜껑 없이 겹쳐 보관하는 것이 부피적으로 이득인지 고려해서 차이가 크다면 뚜껑을 따로 보관한다. 하지만 큰 차이가 없다면 뚜껑을 각각 덮어 보관하는 게 다음 사용에 편리하다. 꼭 기억할 것은 생각보다 밀폐용기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점. 특히 오래된 플라스틱 용기는 지금, 바로, 당장 정리할 타이밍이다.
6) 물건이 숨 쉴 바람구멍이 필요하다.
수납장의 칸이 6개라면 한 칸 정도는 스페어로 존재하는 편이 좋다. 닿기 어려운 최상단이나 최하단에 물건을 두면 그 물건은 버릴 때까지 꺼내지 않을 확률이 크다. 손이 자주 가는 아기 물병과 밥그릇은 왼쪽에, 자주 쓰지 않는 도시락은 (조금 더 구석자리인) 오른쪽, 가장 윗자리는 비워두기. 생활해 보니 나쁘지 않은 위치다.
7) 비움에도 숙려기간이 필요해.
사람과 이별할 때 가지는 숙려 시간. 물건과의 이별이라고 다를까. 버릴지 말지 고민스럽다면 무턱대고 버리지 않는다. 바구니 하나 정도 고민의 숙제를 남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갖도록 해. 그때도 이 마음 변치 않는다면 아쉬워도 안녕이야.
8) 결국 정리는 나의 생활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보기 좋게 정리하는 게 아니라, 쓰기 좋게 정리해야 한다. 물컵은 정수기 바로 위 선반에, 밥그릇과 식판은 밥솥과 인덕션 근처. 가벼운 접시는 상부장에, 무겁고 큰 것은 하부장에 보관한다. 요리에 사용되는 양념은 인덕션 바로 밑에 넣되 바구니에 담아 서랍처럼 사용하기. 무침 요리에 자주 쓰이는 비닐장갑은 하부장 문에 붙여 놓고 사용한다. 생활하며 생긴 잔머리와 잔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정리를 단순노동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11년 차 주부로서 단언컨대 주방 정리는 고도의 정신노동이다. 어릴 때 했던 테트리스는 이때를 위한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공간을 나누고 쪼개고 얹어야 한다. 생활 습관, 주부의 키, 요리의 동선 등 고려할 점이 아주 많은 것이 주방 정리다. 버릴 것도, 정리할 것도 많은 주부 업무의 최전선. 그러나 한 번만 제대로 자리를 잡아 놓으면 만족도가 가장 높은 곳 또한 이곳 주방이다.
무엇보다 주방 정리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고민을 할 겨를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버릴 건지, 어디에 넣을 건지, 어떻게 담을 건지 부지런히 잔머리를 굴려야 한다. 머리가 복잡하다면, 고민이 많다면 주방 팬트리와 수납장의 문을 활짝 열어보자. 고민을 날려버릴 시간의 문이 열린다.
아! 그러고 보니 다음 주에는 냉장고 편. 더 재밌다는 소문이 있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