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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나 Jan 03. 2024

너희라서 고마워

- 독감이 남기고 간 이야기

 11월에 걸렸던 코로나로 체력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말에는 독감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출처가 미상이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우리 가족 중 1번으로 당첨된 것이 바로 나님 되시겠다. 난생처음 독감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목이 간질간질 잔기침이 나서 대수롭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니 골반이 삐거덕댄다. 몸이 좀 이상한데 싶더니 온몸의 관절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입이 마르고 입김이 뜨거워지는 걸 보니 열이 나나보다. 체온을 재 보니 38.5도. 곧이어 39도를 사뿐히 넘는다. 출산을 제외하고서 이토록 아파본 적은 처음이다. 그야말로 병자모드가 되었다. 엄마이자 아내이자 주부인 나는 그대로 누워버렸다.

      

 병원에 달려가 독감 검사를 하니 A표시에 희미한 선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당첨이구나. 곧장 링거를 맞고, 집에 돌아와서는 받아온 약과 각종 영양제를 몸에 부어 넣었다. 얼른 나아야지. 아이들에게 옮기면 안 돼.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역시 엄마가 아프면 집안이 어수선해진다는 말은 진리다. 어쩐지 아이들이 꼬질해 보이고, 밥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아진다.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바쁜 시간. 아픈 나보다 아이들이 더 걱정이었다.

       

 마치 선심을 쓰듯 아이들에게 만화 영화를 (최대한 러닝타임이 긴 걸로 골라) 보여준다. 두꺼운 마스크를 끼고서 그 옆에 베개를 베고 누웠다. 약기운이 사르르 퍼지더니 몽롱함이 밀려온다. 약을 먹으면 졸릴 수 있다더니 하품을 이길 수 없다. 스르르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니 아이들이 내 옆에 붙어 앉아 만화에 심취해 있다. 아이들의 몸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더없이 따뜻해서 다시 잠이 들었다.

       


 꿈속에는 어린 내가 누워있었다. 5살쯤 됐을까. 감기라도 걸려 누워 있는지 이리저리 뒤척인다. 꿈속의 나는 아프다기보다는 외롭다. 거실에 깔린 갈색의 카펫은 모양을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올올이 이어져있고, 극세사처럼 보들한 촉감이지만 적막함이 포근함을 덮어버린 것만 같다. 감기약을 먹은 건지, 왜 낮잠을 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잠이 살풋 들었다 깬 것 같다.


 어린 내가 혼자 잠이 깨 거실에 앉았다. 시계의 초침이 째깍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가끔 웅웅 대며 돌아가는 냉장고의 모터 소리, 싱크대에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깜빡깜빡 움직이는 비디오의 시계만이 함께였다. 어린 나를 맡길 곳이 없어 엄마는 나를 잠시 집에 혼자 두고 회사에 복귀를 했으리라. 엄마가 되어보니 그때 엄마가 느꼈을 애달픈 마음이 내 마음처럼 느껴지지만, 그땐 어렸고 아팠으니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걸 보면 어린 이해심은 마음의 길이가 그 정도였나 보다. 온기가 전혀 없는 차가운 극세사 담요를 덮고 다시 누웠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니 거실이다. 햇살이 들이치는 우리의 집. 너희와 함께인 지금으로.

 소파에 누운 채로 살풋 눈을 떴다. 만화 시청에 시들해진 두 아이가 까르르 대며 놀고 있는 장면이 눈앞이다. 형아의 변신 자동차를 만지고, 때로는 던지며 신이 난 둘째.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며 웃고 있는 첫째가 있다. 그러다 뭐에 속이 상했는지 둘째가 으앙 울음을 놓으면 형아는 최대한의 기지를 발휘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러면 이내 또 거실은 웃음꽃밭이 된다.


 무려 8살 차이가 나는 두 아이가 이렇게 재미있게 함께 놀 수 있을 거라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아이들은 엄마가 잠든 사이 곱절로 가까워져 있었다. 둘째는 형아의 모든 걸 따라 하고, 신기해하며 즐겁다. 첫째는 그런 동생의 모습이 어이없으면서 귀여워 깔깔대는 중이다.

           

 아, 이곳. 너희가 웃고 있는 나의 거실로 돌아왔구나. 어쩌면 무의식에 남았을 낮잠의 안 좋은 기억들이 모두 정화되는 순간이다. 당장 카메라를 들어 두 아이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손가락도 말을 듣지 않는 독감자는 그저 눈에 고이 담을 뿐이었다.


 독감이 얼른 지나가 버리면 좋겠는데, 이 순간만은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되뇌고 또 되뇌었다.

 너희여서 고맙다. 내게 와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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