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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복주 박풀고갱 Oct 19. 2022

액땜했다고 정신승리

잘 못 된 여행 03

살면서 순조로운 시작이 얼마나 있었던가.

시작은 거의 불길했다.

여행 전날, 짐을 싸기 위해 미리 오후 반나절의 휴가를 신청해두었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팟캐스트 편집을 위해 오전 휴가를 추가했다.

PC를 켜고 여행 기간 동안 공백이 될 업무를 몇 가지 처리하고 난 뒤였다.

'삑'하면서 모니터가 한일 자의 백색 잔상을 남기며 블랙아웃되었다.

꺼진 건 모니터만이 아니었다. 아파트 전체가 전기 점검을 위해 3시간 동안 정전이라는 것이다.

아파트에 살면서 가장 싫은 건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각종 공지 방송이 소음 수준이라는 점인데 오늘 같은 날은 왜 한줄기 방송도 없었는지...

언제나 그렇듯 이 정도의 재수 없음은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면서 돈이 들어도 몸이 편한 쪽을 선택하는 일이 잦아졌다.

집 근처에 지하철역이 없다 보니 공항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야 한다. 게다가 대형 짐가방이 한 개뿐이라 캐리어가 대, 중, 소 3개나 되었다.

전격, 택시를 타기로 했다. 이런 일에는 박풀고갱이 발 빠르게 움직인다.

새벽에 카카오 택시가 잡히지 않을까 봐 인천공항 콜택시 서비스를 미리 신청했다.

아파트 앞 벤치에서 약속한 시간보다 미리 나와서 기다리는데,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도 택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30분 정도 늦은 기사님이 타워형 주차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다며 죄송하다고 하는데, 괜찮다는 응답이 나오지 않았다.

택시가 달리는 동안 옹졸해진 마음을 애써 달랬다.

'택시 기사님도 얼마나 애가 탔을까. 액땜이라 생각하자.'


고작 그 정도의 미미한 액땜의 효과는 대륙을 넘지 못하나 보다.

JFK공항에서 맨하튼으로 들어갈 때 한인이 운영하는 공항 셔틀을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같이 2명인 경우는 한인 셔틀이 우버 택시보다 정말 살짝 저렴할 뿐이었지만, 낯선 곳에 처음 내려 편안한 한국말로 숙소까지 이동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JFK공항에 도착하는 한국발 비행기 2대가 모두 오전 11시 언저리에 도착하기에 그 승객들이 인터넷 여행사를 통해 신청을 하는 것인데 15명 정도가 셔틀버스 1 대를 함께 이용한다.

미국 입국 심사에서 억류되는 등의 시간을 고려하여 12시 30분까지는 기다려주는데 그 이후는 셔틀이 출발할 수 있다고 이용 주의사항에 적혀 있다.

11시 20분 정도에 셔틀에 타서 기다렸다. 좌석도 거의 다 찼는데 12시가 넘도록 출발을 안 하니 한 승객과 운전기사가 크게 다퉜다. 사오십대로 보이는 그 승객은 와이프와 함께 탔는데 예약한 사람이 와이프라서 주의사항을 몰랐던 같았다. 그래도 손님인데 운전기사는 뉴욕에서는 손님이 왕이 아니라며 큰소리를 쳤다.

이런 일에 잘 나서지 않는 박풀고갱이 "여행 첫날인데 기분 좋게 시작합시다."라고 하니 어영부영 무마가 되었다.

알고 보니 마지막으로 타야 할 손님이 공항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어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12시 50분경에 탄 그 손님은 어떤 미국인이 자기 캐리어를 갖고 집까지 가는 바람에 가방을 찾아서 오느라 늦었다. 이삼십대로 보이는 그 여성은 "남의 짐을 갖고 가놓고 미안하다는 소리도 안 하는 거예요. 열받게!"라고 속엣말을 쏟아냈다.

박풀고갱의 말처럼 여행 첫날인데 액땜했다고 정신 승리하는 수밖에.


공항에서 한 시간 반을 버린 후, 이게 정말 뉴욕인가 싶은 시골스러운 길을 달리는데 차창으로 도심의 빌딩들이 나타났다.

"맨하튼!"

설렐 일인가 싶은데 설렜다.

그래, 이 맛이지.

차창 저 너머 맨하튼이 보인다


추신. 2명이라면 한인 셔틀보다는 우버 택시를 추천해요. 셔틀은 허비되는 시간도 많고 딱 숙소 앞에 내려주지 않기 때문에 캐리어를 끌고 숙소까지 걸어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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