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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복주 박풀고갱 Oct 19. 2022

술 갖고 있습니까?

잘 못 된 여행 04

처음 여권을 만들었을 때는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는 입국심사가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입국 심사대도 없이 무정차 통과하는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괜스레 아쉽기도 했으니까.

그동안 손쉽게 국경을 통과해왔기에 입국 심사가 까다롭다는 미국이 두려웠다.

비행기가 JKF공항에 착륙을 준비하자, 영어를 아주 못하는 박풀고갱은 주섬주섬 미국 입국 예상 질문과 답안지를 꺼내들고 외우기 시작했다.

입국 심사를 위한 줄을 서는데 안내하시는 분이 "이스타(ESTA)?"라고 묻는다.


미국 여행을 위해서는 ESTA(Electronic System for Travel Authorization)를 통해 여행 허가를 받아야 한다. 통상 72시간 이내에 허가가 떨어진다지만, JTBC [플라이 투 더 댄스]에 캐스팅되어 미국 촬영이 예정되어 있던 댄서 가비에게 여행 허가가 떨어지지 않은 것에 충격을 받아 3주 전에 미리 신청했다. 행여라도 허가가 안 떨어지면 대책을 세워야 하니까. 다행히 우리는 신청한 다음날 바로 허가가 떨어졌다.

ESTA 웹사이트가 한국어 지원을 하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기입하면 어려운 것은 없다. (인내심은 정말 필요하다.) 근데 가장 어려운 질문이 딱 하나 있었다. 

3번째 단계에서 위와 같은 질문이 나오는데 '나 원 참, 무슨 말인지...' 

아래 영어 원문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겠다. 현재 직장 또는 이전 직장이 있으면 쓰라는 거다.

네티즌들 중에 '예'라고 답하면 여행 허가가 거절되니 반드시 '아니오'를 하라는 분들도 있었으나 '예'라고 하면 직장정보를 기입해야하는 수고로움이 생길 뿐 '예, 아니오'가 여행 허가 여부를 좌우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입국 심사 줄에서 "이스타?"라고 묻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면 한쪽 줄로 분리된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예상 질문지와 답안지를 초초하게 들여다보던 박풀고갱이 어느덧 여유로워졌다. 앞서 심사를 받는 사람들을 보니까 일행은 함께 심사대를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풀고갱과 함께 심사대에 섰다.

"왜 왔느냐? 어디에 묵을 거냐? 얼마나 있을 거냐? 뉴욕에만 있을 거냐?"

예상했던 질문들에 준비했던 대답을 했다.

근데 갑자기 쑥 들어온 다음 질문에 당황했다.

"술 갖고 있냐?"

정말 찰나의 갈등을 했다. 한국 면세점에서 산 보드카가 한 병 있었던 것이다.

대답은 "NO!"

까다로운 질문에는 '아니오'가 정답인 경우가 많으니까.

다음 질문은 "현금 얼마나 갖고 왔니?"

소심한 인간이라 거짓말을 한 번 하자 머릿속이 뒤엉켜서 헛소리가 나왔다.

"각자 5달러씩이요."

심사관이 갸우뚱하자 영알못인 박풀고갱이 큰일 했다.

"파이브 헌드레드"라고 박풀고갱이 대답하자, 심사관은 교묘한 질문을 던졌다.

"파이브 제로, 제로, 제로 달러 이치?(각자 5,000달러씩 갖고 온 거니?)"

친절한 건지 뭔지, 제로라고 말할 때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가며 물어봤다.

미국 입국시 현금 1만 달러를 운반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에 '예'라고 대답하면 안 되는 질문이었다.

역시 까다로운 질문에는 'NO'.

무사히 미국 국경 통과!

휴~


추신.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은 주제에 '파이브 헌드레드'라고 영어 한마디 한 걸 가지고 박풀고갱의 어깨가 얼마나 올라갔는지... 나 원 참... 하지만 그 숟가락 덕분에 미국 밥을 먹게 되었으니 인정한다. 유 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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