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못 된 여행 11
친구들과 술김에 지리산을 가기로 결의한 적이 있다. 술을 깨고 보니 술에 찌든 몸들이 클리어할 수 있는 미션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리 중에는 꼭 한 명씩 행동 대장이 있다. 한 친구의 영도 아래, 한 달 반 가량 매주 서울에 있는 산을 올랐다. 일정 때문에 등산을 못 가는 주말에는 11층인 집까지 걸어 올라갔다. 그렇게 몸을 만든 후 지리산 등반에 성공했다.
이번 뉴욕 여행도 저질 체력으로 무리일 거 같아 지리산 때처럼 특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풀고갱도 나도 행동 대장 스타일이 아니다. 바쁘다는 핑계에 쉽게 몸을 내려 놓았다.
체력이 저질인 채로 뉴욕 관광을 시작했다. 평소 운동을 안 하다가 갑자기 하루에 평균 2만 보 이상 걸으니 생전 처음 발가락에 물집까지 잡혔다. 핸드폰 건강 앱에서는 움직이기 추세가 달라졌다고 리포팅도 해줬다.
여행 넷째 날, 비 예보가 있어서 가이드 박풀고갱은 실내 관광을 내놓았다.
뉴욕 자연사 박물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하루에 주파하는 야무진 계획이었다. 자연사 박물관까지는 그럭저럭 생생했다. 센트럴파크를 통과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걸어서 이동할 때에도 밝은 표정으로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전시관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점점 좀비로 변해 이 전시관에서 저 전시관으로 옮겨 다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원포인트 관람을 하기로 했다. 미술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는 작가 중심으로 공략했다. 고흐, 모네, 쇠라 등 주로 인상파 화가들을 섭렵하고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잭슨 폴록의 그림까지 찾았다.(그렇다. 감상이 아니라 찾으러 다녔다.)
이제 피카소만 찾으면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겠다. 근데 너무 지친다. 항복을 선언하며 한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시큐리티에게 피카소 그림을 어디에서 볼 수 있냐고 물었다.
시큐리티는 '얘들 뭐지?' 하는 표정으로 "이거, 저거, 저거, 저거 모두 피카소 그림이잖아."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 방은 피카소 그림 전시관이었던 것이다. 손톱만 한 힘이라도 내어 그림 하나만 살펴봤더라도 일자무식을 면했을 텐데.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한국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같은 한국 사람이 봤다면 우리의 부끄러움도 그들의 몫이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