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리복주 박풀고갱 Oct 22. 2022

영어도 잘 못하면서

잘 못 된 여행 07

이전 직장에서 몇몇 동료들끼리 돈을 모아, 한국인 영어 선생님을 모시고 소규모 영어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영어 발음을 엄청 교정해주셨는데 그중에 'she'를 말할 때마다 대여섯 번 이상 발음하게 했다. 그리고는 크게 고개를 저으며 아메리칸 제스처로 "디재스터 disaster!(이건 재앙이야!)"라고 외쳤다.

(경상도 출신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쌍시옷 발음은 신경을 써야만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경상도 출신이라서 'she' 발음이 잘 안 되었나 보다. 안 그래도 소심한 성격이라 위축되긴 했지만 자존심은 상하지 않았다.

외려 '본인도 한국인이면서 뭔 영어 발음 교정?'이라며 정신 승리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 와서 서울 말투를 흉내 내 보았지만 "경상도 쪽에서 오셨나 봐요?"라는 말을 계속 듣다 보니 언어는 발음보다는 독해(literacy)와 말하고 싶은 내용의 유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고 자란 한국의 표준어 흉내도 제대로 못 내는 처지에 영어 발음을 못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she’ 발음을 지적했던 그 영어 선생님도 한국인이면서 부산 사투리와 대구 사투리를 구별하지 못할 걸?

그래서 영어는 잘 못하지만 주눅 들지 않으려고 한다.

근데 자신이 이해한 것이 옳다는 확신은 금물이다. 이건 한국어나 영어나 매한가지다.


자유의 여신상의 섬인 리버티 섬을 떠나기 전, 유람선을 타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둘렀던 터라 배가 고팠다. 섬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햄버거 2개에 커피 2잔을 주문하고 값을 지불하니 30.50 달러, 한화로 4만 5천 원이 넘는 금액이다. 하루 새 물가에 적응했는지 뉴욕에서 이만하면 싼 거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피클도 4개나 공짜로 줬으니까.

아침을 먹고 카페테리아 옆에 있는 기념품점에 들렀다. 물가 적응에 성공했는지 4.95달러(세금이 추가되면 8천 원 정도) 짜리 '중국산' 자유의 여신상 자석 가격이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어라? 하나 사면 하나는 거저 준다고 쓰여 있네? 어머, 이건 무조건 사야 해.'

반값이라고 생각하니 구매 충동이 마구 일었다. 해외여행을 자주 다녀도 형제자매들에게 공항 면세점 과자를 사다 안기는 게 전부였는데 이번엔 요걸 하나씩 돌릴까 싶었다. 8개나 집어 계산대로 가져갔다.

득템 했다는 뿌듯함을 안고 엘리스 섬으로 향하는 배를 타면서 영수증을 보니, 자석 4개는 원래 가격이고 나머지 4개만 반값 할인이 적용되어 있다. 배를 탔으니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간대도 짧은 영어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을까? 할인을 제대로 적용해주지 않은 점원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점원이 그럴 이유가 뭐란 말인가?


엘리스 섬에서 맨하탄으로 돌아와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다보이는 해변 카페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니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문득 영어도 잘 못하면서 애먼 점원을 원망했다는 깨달음이 왔다. (왜 갑자기 깨달았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자유의 여신상 자석 매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buy 1 get 1 50% off

하나 사면 하나는 반값으로 가져가라는 거다.

근데 제멋대로 끊어 읽어서 "하나 사면 하나는 공짜! 반값 세일~((buy 1 get 1! 50% off~)"로 해석했던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오해를 했네. 점원 언니, 쏘리, 쏘리~


추신. 뉴욕에 있는 동안, 5박 6일 패키지로 미 동부와 캐나다의 토론토, 몬트리올, 퀘벡을 다녀왔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올 때도 역시 입국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일행 중 어떤 모녀가 심사관의 호된 갈굼(?)을 당해서 면세점에서 산 물건 보따리를 풀고 난리도 아니었다. 심사관의 어떤 질문에 딸이 고개를 끄덕이자 짐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한국어와 영어의 가장 큰 차이 때문에 발생한 일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영어로 "ㅇㅇㅇ 갖고 있는 거 없지?(Don't you have~?)"라고 물었을 때 한국어로는 "예"하면 없다는 거지만, 영어는 "아니"라고 해야 없다는 거다. 영어는 '없다'는 단어가 없고, '있지 않다'가 '없다'이기 때문인 거 같다. 영어는 '있으면' 예스(Yes, I have.)고 '있지 않으면'(없으면) 노(No, I don't have)인 것이다.

남의 나라 언어는 역시 어렵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유의 여신상, 무료 페리 or not?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