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못 된 여행 09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면 주인공 앤디가 아빠와 함께 뮤지컬 [시카고]를 보러 간다. 허리케인이 몰려온 마이애미에 있는 미란다가 뉴욕행 비행기를 당장 구하라는 전화를 해댈 때이다. 생각해보니 아빠랑 딸이 함께 볼 뮤지컬로 [시카고]를 선택했다니 범상치 않다 싶기도 하네.
아무튼 우리도 [시카고]를 보러 갔다.
뉴욕과 런던을 여행한다면 뮤지컬은 꼭 봐줘야지. 기회가 있을 때 꼭 봐야 한다. 처음 런던에 갔을 때 [빌리 엘리엇]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도 보지 않았더니 그 후 런던에 갈 일이 2번 더 있었는데 더 이상 [빌리 엘리엇] 공연이 없어서, 보고 싶어도 못 보게 되었다. 볼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봐야 한다.
티켓은 좋은 자리를 보장한다는 구매 대행 서비스에서 1장에 130달러(약 19만 원)에 구입했다.
살다 보면 돈이 더 없냐, 시간이 더 없지.
기왕이면 좋은 자리에서 보고 싶어서 가장 비싼 오케스트라 석을 선택했다.
평일 공연이라 그런가. 좋아도 너무 좋은 자리로 배정받았다. 맨 앞줄 중앙.
당일 캐스팅은 벨마 역에 앰라 페이 라이트 (Amra-Faye Wright), 록시 역에 안젤리카 로스(Angelica Ross)였다. 두 사람 다 처음 본 배우들이지만 처음 벨마가 등장할 때부터 압도되었다.
맨 앞 줄이어서 배우의 몸을 보고 배우의 나이를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에너지가 대단했다.(멀리서 봤다면 30대 후반이나 40대로 알았을 것이다.)
구글링 해보니 1960년 생으로 한국 나이로 63세!
너무 멋지다.
극 중 벨마의 나이대인 40대에 벨마 역을 시작해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2019년 인터뷰를 유튜브에서 찾았는데(https://youtu.be/xCciBmeg_0U) 극 중 벨마는 40대인데 본인은 그 나이를 지나 팔뚝 살도 늘어지고 목의 주름도 보일 건데, 보인다는 것은 그게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벨마의 (역할을 하며 내가 누렸던 모든) 영광과 늙어가는 것 등등이 벨마의 캐릭터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고. https://www.buffalocitytourism.co.za/post/our-people-amra-faye-wright
어른이다.
록시 역을 맡았던 안젤리카 로스는 흑인 여성으로, 찾아보니 우리가 공연을 봤던 2022년 9월부터 시카고에 합류한 모양이다. 브로드웨이에서 25년 장기 공연에 트랜스젠더가 캐스팅된 것은 공식적으로 처음이라고 한다.
https://www.today.com/popculture/popculture/angelica-ross-chicago-roxie-hart-rcna47192
영화로 [시카고]를 처음 접했기에 흑인 여성이 록시로 나와서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극 중 역할을 찰떡까지 잘 소화했다.
[시카고]는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에서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며 연주하기에 맨 앞줄은 그야말로 정말 코앞이다. 배우들의 침이 튀는 것도 다 보일 정도였는데, 무대 전체를 보려면 고개를 좌우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뒷목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14시간 비행 후 바로 다음 날이라 피곤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영어를 다 알아듣기 힘들어서 약간 졸렸다. 영알못인 박풀고갱은 더 힘들었는지 눈을 오랫동안 감았다가 뜨기도 했다. 맨 앞줄이니 배우들이 알아볼까 봐 무대가 어두워질 때만 감고 있었다나.
2층(mezzanine)에서 봐도 좋을 듯하다. 다음 기회란 없겠지만 행여나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2층을 예매해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추신. 뉴욕에 간 김에 뮤지컬을 하나 더 봤다. [알라딘]
구매 대행업체에서 오케스트라석 1장에 147달러(약 22만 원)에 구입했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 있는 뮤지컬이라 그런지 티켓값은 더 비쌌지만 앞에서 적당히 떨어진 좌석이 배정되었다.
[알라딘]은 누구나 좋아할 만한 뮤지컬인 거 같다. 마술 쇼 요소도 있고, 특히 양탄자 장면은 정말 환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