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못 된 여행 15
비싼 숙박료를 치르고 맨하탄 중심가에 숙소를 구한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여행하는 동안 매일 타임스퀘어를 거쳐갈 수 있다는 점이다. 기업 광고판이 늘어 선 빌딩가를 지나는 게 뭐가 좋다고 장점이냐고? 그러게...
그런데 신기한 게, 보면 볼수록 좋다. 대낮에도 선명한 광고판의 그래픽이 매번 보는 사람의 눈을 휘둥그래 뜨게 만들었다.
뉴욕 체류 기간 동안, 코믹콘*이 있어 한국에서 미리 표를 예매했다. 체류비가 비싼 만큼 가성비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움직였다. 타임스퀘어를 걸어서 지나가는데 그동안 막혀 있었던 곳에 포토존이 생겼다. 타임스퀘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만들어 둔 것인데, 역시 어느 곳을 가나 주요 스폿에서는 줄을 서야 한다. 이른 시간이라 다행히 줄이 길지는 않았다.
우리 앞에 선 아프리카계 남자가 핸드폰을 내밀며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다. 그의 앞에는 중국계 일행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그들이 사진 찍기를 마쳤나 싶은 순간, 전원이 사진에 담기고 싶었는지 그들은 아프리카계 남자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요청했다. 그는 그들의 사진을 찍어 준 후 포토존에 섰고, 박풀고갱이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그의 핸드폰이 꺼졌다.
당황한 박풀고갱은 그에게 까맣게 죽은 핸드폰을 건넸고, 그는 "핸드폰이 죽었나요?(Is it Die?)"라고 안타깝게 외쳤다. 중국계 일행들이 전원 사진 촬영을 하지 않았다면 아프리카계 남성이 타임스퀘어를 배경으로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큰맘 먹고 뉴욕 여행을 온 사람 같았는데 너무도 안타까웠다.
머쓱했던지 그는 재빨리 자리를 떠났고, 우리 뒤에 서 있던 남녀 커플은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자청했다.
우리가 먼저 사진을 찍고, 뒤 커플의 사진을 찍어주고자 박풀고갱이 그들의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포토존에 선 남성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여성에게 내밀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을 직관하다니!
박풀고갱은 그들의 소중한 순간을 담아 주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고, 나는 당황한 나머지 중요한 순간은 놓치고 그들의 포옹 장면부터 겨우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당황한 내 손가락은 나도 모르게 카메라 렌즈를 가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거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흥분했고,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박수를 보냈다.
박풀고갱과 10년째 여행을 다니는 동안 만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코믹콘 전시장으로 향하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사진을 못 찍은 그분이 떠올랐다. 조금만 순발력을 발휘했다면 우리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이메일로 보내줬으면 됐을 텐데...
희비가 엇갈리는 아침이었다.
*뉴욕 코믹콘 : 뉴욕시에서 개최하는 만화, 그래픽 노블, 아니메, 비디오 게임, 코스튬 플레이, 장난감, 영화 및 텔레비전 등을 다루는 종합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