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못 된 여행 16
[빨간 책방] 팟캐스트에서 이동진 기자가 미국 식당에서 팁 계산을 잘못해서 좀 덜 주고 나왔더니 웨이터가 따라 나와서 마구 화를 내며 더 받아가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팁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람이라서 팁의 나라를 여행한다는 게 처음부터 두려웠다.
그깟 팁, 주면 되지 두려울 거까지 있겠나 싶겠지만, 소심한 사람은 팁을 줄 때 부끄러워한다. 제값을 못 줘서 망신당할까 봐도 두렵고.
대부분의 식당에서는 영수증에 팁의 15%에서 20%까지 단계별로 금액이 적혀 있어서 주고 싶은 퍼센티지를 선택하면 되어서 쉬웠다. 셀프 서빙의 경우 No Tip을 선택해도 된다.
서빙을 해주는 식당에서는 테이블에 앉아서 계산을 하는데 음식값을 먼저 지불하면 웨이터가 팁이 표시되어 있는 영수증을 갖고 온다. 원하는 팁의 퍼센티지를 선택하고 해당 금액을 더한 값을 최종적으로 영수증에 써서 웨이터에게 건네면 계산이 완료된다. 신용카드로 계산하는 경우, 팁은 당일에 결제되지 않고 며칠 후에 청구된다.
현금만 받는 식당이 있었는데, 무려 백종원이 소개한 미국식 아침 식사를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Tom's RESTAURANT이라는 곳으로 현금을 준비 못한 손님을 위한 현금 인출기가 구비되어 있다.
팁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시중을 드는 사람에게 위로와 고마움의 뜻으로 일정한 대금 이외에 더 주는 돈이라고 되어 있다. Tom's RESTAURANT에서는 전혀 고맙지 않아서 팁을 안 주고 싶었다. 보통 고맙지 않아도 강제인 거 같아서 줄 수밖에 없지만 Tom's RESTAURANT에서는 고맙기는커녕 기분이 상했다.
들어서자마자 우리 같은 관광객은 한 명도 없는 거 같아서 살짝 쫄았다. 테이블 석이 없어서 바에 앉았는데 주문을 하고 나니 테이블 석이 나와서, 옮겨도 되냐고 웨이트리스에게 물으니 엄청 위협적으로 바에 앉았으면 계속 바에 앉아야 한다고 했다. 후덜덜... 너무 사나웠다.
시켰던 음식이 나오자 바의 웨이터는 음식을 거의 던지듯 서빙해 줬다. 우리한테만 그러는 건지 다른 손님에게도 그러는 건지 옆자리에 새로 앉은 손님에게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니 우리한테만 그러는 것 같았다. 옆 손님처럼 "굿모닝"이라고 인사를 하지 않아서 인가? 뭐가 잘못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에서 주문한 주제에 테이블로 옮기려고 했던 게 화근이었던 거 같다. 한국과 달리 미국 식당의 점원들에겐 '내 손님, 니 손님'이 따로 있다. 바 서빙 웨이터가 '내 손님'인 줄 알고 주문을 받았는데, 우리는 '내 웨이터'를 배신하고 다른 웨이트리스에게 가려고 했던 거다. 웨이터는 우리에게 음식 접시를 던지며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야, 니네들. 주문은 나한테 해놓고 다른 웨이트리스에게 가려고 했지? 주문은 내가 받았으니 팁은 내 거라고!"
우리가 자리를 테이블로 옮겨도 되냐고 물어봤던 그 웨이터리스의 사나운 태도 안에는 이런 속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것들이! 바에서 주문한 주제에, 내 테이블에 앉아서 먹으면, 팁은 누구한테 줄 건데? 서빙은 내가 해도 팁은 쟤한테 갈 수도 있다고!!'
제멋대로 추측한 것이지만 개연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닐 것 같다.
북미 지역을 여행하면서 가장 적응 안 되는 게 '내 웨이터' 문화다. 캐나다 퀘벡에서도 '내 웨이터는 처음이라' 황당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Tom's RESTAURANT에서는 결국 팁을 안 줬다.
바에 앉아서 옆 테이블을 보니까 옆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웨이터에게 계산서를 달라고 하자, 웨이터는 계산서를 주고 나서 다른 일을 보더라고. 옆 손님이 1달러를 바 테이블에 얹어 두고, 계산은 카운터에서 하고 나갔는데, 웨이터는 한참 있다가 테이블을 치우면서 팁을 가져가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그냥 카운터에서 계산만 했지. 팁은 안 주고.
행여나 이동진 기자가 경험했던 것처럼 쫓아 나오면 어쩌나 해서 쫄았지만, '내 웨이터'는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미국은 식당에서 서빙하는 점원들의 시급이 너무 낮기 때문에 점원들은 팁으로 벌이를 충당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최저임금 개념이 고용주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 50개 주 중 42개 주에서는 팁과 기본급을 합해서 법정최저임금을 정해도 된다고 한다. 결국 고용주는 법정최저임금 미만으로 기본급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점원은 팁으로 충당할 수밖에.
뉴욕주의 경우 2019년에 세차원, 미용사, 네일살롱 등은 법정최저임금에 팁을 포함시킬 수 없도록 정해졌으나, 음식점과 술집은 여전히 팁이 최저임금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한다.
팁이 최저임금안에 포함되는 것을 폐지하려는 법안이 준비중이지만 아직 제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의 식당 노동자를 위해서 해당 법안이 꼭 성사되기를 바란다. 투쟁!
이런 저런 사정을 생각하니 기분이 나빴어도 팁을 줄 걸 그랬나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