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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복주 박풀고갱 May 16. 2024

자학개그하고 싶은 날씨

농담에 대한 명상

2024.05.13.


[굿 윌 헌팅](1997)은 MIT대학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던 천재 윌 헌팅이, 그동안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상처받았던 마음을 열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이다. 윌은 또래 친구들과 하릴없이 싸돌아 다니며 말썽을 일으키곤 했다. 친구들과 쓰잘데기 없는 농담과 상스러운 소리를 주고받는다. 그중 엄마를 소재로 한 농담이 있었는데 저런 농담을 해도 되나 싶지만 그들끼리는 낄낄거리며 웃는다.

빗 속에 전화를 하러 나갔다가 번호를 잊어버렸다며 차로 돌아온 윌에게 친구 모건이 "바보네. 기껏 비 맞으며 나갔는데 전화번호를 까먹냐?"라고 하자 윌이 이렇게 대답한다.

"너네 엄마하고 야한 전화 하다가 동전이 떨어져서 관뒀다, 왜? No, it was your mother’s 900 number. I just ran out of quarters."

"그랬냐? 나도 너네 엄마한테 전화했었어. Why don’t we get off on mothers? I just got off yours."

그러면서 서로 낄낄 웃는다.

웃을 수 있는 농담 맞나? :ㅁ

디즈니 플러스의 [더 베어]라는 드라마는 카르멘이라는 유명 셰프가 망해가는 식당을 미슐랭 급 식당으로 되살려 보려는 이야기인데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소수자이다. 이탈리아 이민자, 아프리카계, 라틴계, 아랍계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식당 노동자들 중에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다음은 마커스라는 아프리카계 파티쉐와 아랍계 이브라힘이라는 조리사의 대화다.

이브라힘 : 마커스, 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개자식이야.  Marcus, You are my favorite bitch.

마커스: 점점 못된 영어만 느네요. 해적이라도 되시나? Your English is getting tight. Kidnap a ship captain?

이브라힘 : 네 엄마랑 자면서 배웠다. Your mom teach me during sex.

마커스 : (약간 정색) 진짜 기분 나쁘네요. (활짝 웃으며) 바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Oh, that’s not cool. That’s how you’re doing it.

이들 역시 서로 유쾌하게 웃는다. :ㅁ

농담의 수위가 센데도 위 영화의 캐릭터들이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이들이 쌓아온 관계성과 맥락 때문일 거 같다.


명랑한 암환자로 사는 데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농담의 수위이다. 한쪽 유방을 잘라냈으니 그 자리에는 꽤 큰 흉터와 빈자리가 남아 있다. 수술 직후에는 핏자국과 의료용 테이프가 남아 있어서 보기에 편하지는 않다. 근데 지금 보면 남아 있는 한쪽 유방이 외눈박이 괴물 같아 꽤 귀엽다.

동생과 물놀이장 얘기를 하는데, 외부 음식 반입이 안 돼서 삶은 고구마를 뺏겼다고 했다. 내가 "아이고, 나는 이제 숨길 곳이 있는데... 오른쪽 브라 안 쪽에 숨겨서 들어가면 되겠다.ㅎㅎㅎㅎ"라고 했더니,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동생은 씁쓸해했다. 사실 동생이 크게 웃었더라면 또 좀 섭섭했을라나? 잘 모르겠다. 근데 이런 자학 개그가 잘 통했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처음이라서 씁쓸해했지만 다음번엔 통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농담을 공개적으로 해도 될까? 나처럼 유방을 잃은 다른 환자분들이 불쾌해하면 어쩌지?


김초엽 작가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라는 소설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 자체가 없는 이상적인 행성이 나온다. 이 행성에서는 성년이 되면 지구로 순례를 떠나는데 그중 일부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거야."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중

김초엽 작가는, 이상적인 세계를 떠나 혐오와 차별이 있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지구에서 정상성에 도전하며 사는 것이 '괴롭지만 행복할 거'라고 보았다.

글쎄... 얄팍한 생각으로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세계에 사는 게 더 좋을 거 같은데... 그런데 그런 세계에 살고 있다면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 건 분명하다.

김초엽 작가가 후천적 청각장애인이라는 걸 어쩌다 알게 되었는데, 만약 김초엽 작가가 소설에 나오는 그 행성에 살고 있다면 [순례자는 왜 돌아오지 않는가]와 같은 소설을 쓸 생각은 못했을 거다.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이 훌륭한 소설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수 있겠다. 괴롭지만 행복하다는 것이 이런 성과를 말하는 것일 수 있겠다.

정상과 비정상이 있는 세계에서 끊임없이 '정상성'에 도전하는 것이 가슴 벅찬 일이기는 한 것 같다.

나는 늘 '정상성'이라는 것에 도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소한 것부터 무게 있는 것까지.... 대부분이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


2012년 영화 [러브 픽션]이 개봉되었을 때, 여자 주인공 희진(공효진)이 겨드랑이 털을 안 깎는다는 것에 남자 주인공 주월(하정우)이 그렇게나 놀란다는 것이, 되려 너무 놀라웠다. 여주인공이 어릴 때 알래스카에 살아서 제모를 안 한다는 영화적 설정이 있어서 또 한 번 놀랐다. 설정까지 필요할 일인가? 털을 안 깎는 게 기본값 아닌가?

겨드랑이 제모를 안 한다. 수영장에 한참 다닐 때 제모를 하기도 했으나 반팔 수영복이 나오고부터 그마저 안 하게 되었다. 솔직히 민소매라도 안 하고 싶긴 한데 차마 용기가 안 나서 제모 대신 민소매를 포기했다.(요즘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남성 출연자들도 상당수 제모를 하는 추세라 씁쓸하기도 하면서 여성만 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외국 영화를 보면 노브라의 여배우들이 항상 부럽지만 노브라 또한 용기가 잘 안 난다.

항암 중 머리가 거의 다 빠져서 외출할 때 비니 위에 캡까지 겹쳐 쓰는데 왜 민머리로 외출하지 못할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물론 추위와 자외선으로부터 두피를 보호해야 하긴 하지만 뭔 말하는지 알쥬?)

암에 걸린 유방을 다 잘라내고 재건을 하지 않아서 한쪽 유방만 있는 상태인데 항암이 끝나면 수영을 다시 하려고 한다. 일본 여행도 갈 예정인데 온천이 유명한 곳도 들를 예정이다. 그런데 과연 샤워장이나 대중목욕탕에서 주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유방이 한쪽만 있다는 게 성적 매력에 영향을 줄까?


애플TV 플러스의 오리지널 드라마 [슬로 호시스 Slow Horses]는 영국 첩보국 MI5에서 슬로 하우스로 쫓겨난 요원들(일명 Slow Horses)이 어쩌다 혹은 어쩌면 잘, 첩보 사건을 해결해 가는 이야기이다. 제이슨 본이나 제임스 본드와 같이 멋지고 능력 있는 스파이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어딘가 허술하고 '오마나, 저런 똥멍청이가 어떻게 스파이가 된 거지?' 싶은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슬로 하우스의 수장은 램(게리 올드만)인데 지저분하고 추태가 역대급이다. 그런데 전문성과 능력치 매력으로 커버한다. 생활감 쩌는 색다른 첩보물이라 할 수 있겠다.

등장인물 중 루이자 가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배우 로잘린드 엘레아사르가 연기를 맡았다. 드라마에서 엄청 섹시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스파이니까 총도 쏴야 하는데 로잘린드 엘레아사르는 손가락에 장애가 있다. 극 중에서 일부러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박풀고갱은 아예 몰랐다고 한다.

무슨 사연일까 궁금하여 로잘린드의 손가락 장애에 대해 구글링 했다. 한국 자료는 별로 없어서 영어로 검색해 보았더니 본인이 그에 대해 이야기한 바가 없다는 내용을 찾았다. 그럼 아무도 안 물어봤다는 건데, 인터뷰 기사들을 찾아보니 아무도 그녀의 손가락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언론에게 찬사를 보낸다. 내 유방이 하나인 것에 대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길 원했으면서 득달같이 그녀의 손가락 장애에 대해 검색해 본 내가 부끄러워졌다.


정상성에 도전하고 싶지만 내 안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 어쩔 수 없는 차별과 혐오가 실천을 방해하고 있다. 사실 아무도 안 쳐다볼 수도 있는데 지레 주목받을까 우려하고 있다. 쳐다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시선을 견디며 계속 겨드랑이 털을 보여주고, 끊임없이 민머리를 까고 다니고, 하나만 있는 유방으로 수영장의 샤워장이든 대중목욕탕이든 턱턱 들어가야 다른 사람들도 익숙해지지 않을까? 그래야 하나만 있는 내 유방이 다른 사람에게도 귀여운 외눈박이 괴물처럼 보이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한쪽 유방만 있는 배우의 섹스 씬도 나왔으면 좋겠다.


최근 섹스 씬이 가장 아름다웠던 영화는 [그렇게 바버라는 앨런을 만났다 Then Barbara Met Alan](2022)이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바버라와 뮤지션 앨런은 카바레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고, 1990년대 영국 장애인 권리 투쟁을 이끌어 1995년 영국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실화인 데다가 주제가 무겁게 느껴지겠지만, 영화는 유쾌하고 감각적이다. 재치와 유머를 장착했다. 장애인 권리 투쟁이라고 하니까 거대한 명분과 주인공의 투사적인 면모를 강조할 거 같지만 그보다는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일하고 데이트하고 섹스도 하는, 러브 스토리이다.

바버라와 앨런은 이렇게 만난다.

왜소증인 바버라는 휠체어에 앉아 코미디 공연을 하며 사람들을 웃긴다. "이게 스탠드업 코미디이긴 하지만 나는...(휠체어 신세라...) ㅎㅎㅎㅎ" ;D

바버라가 무대에서 내려오자 다음 순서인 앨런이 무대에 오른다. 손과 다리에 장애가 있는 앨런 역시 자신의 신체를 소재로 다음 노래를 한다. "... 다리는 어쩌다 그렇게 됐어? 고추는 있어?... 다리는 어쩌다 그렇게 됐어? 다리 때문에 엉덩이 한쪽도 그래? 어쩌다 그렇게 됐어? 뇌도 반밖에 못 써? 병원에 오래 누워 있었어? 부모님이 참 힘드시겠네. 다리는 어쩌다 그렇게 됐어?... 오줌 누고 손을 안 닦았더니 손이 이렇게 됐어. 사고로 이렇게 됐어. 운이 없어서 이렇게 됐어. 트럭으로 가장한 초코바에 치였어.... 어느 다리 말이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  "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신체를 소재로, 농담을 하고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자기혐오가 아니다. 자기부정도 아니다. 열등감은 더더욱 아니다. 장애 당사자로서 자신을 냉정하게 응시한 결과이다. 자기 성찰에서 나온 코미디와 노래이다. 더 나아가 비장애인 중심으로 '스탠드업' 코미디라고 이름 붙인 것에 대해, 장애인을 바라보는 비장애인의 혐오적 시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 당사자라서 가능한 농담이고 당사자라서 가능한 노래이다. 흑인이 '검둥이 nigga'이라는 말을 하면 인종차별이 아니지만 백인이 쓰면 맥락이 달라진다. 백인의 인종 차별과 폭력의 역사가 유구하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문제도 마찬가지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2016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트럼프가 뉴욕 타임즈의 장애인 기자 코발레스키를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농담에는 맥락과 권력성이 있다. 농담을 하는 사람만 즐거운 경우는 그 사람이 권력을 휘두른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농담이 될 수 없다. 당사자가 자신의 아픔에 대해 농담을 할 때는 가진 적이 없는 권력을 획득하려는 것이기에 일종의 전복성을 띤다.

그렇다면 나의 유방암 농담은 괜찮은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982년 영화 [코미디의 왕]은 루퍼트 펍킨(로버트 드 니로)이라는 코미디언 지망생이 거물 코미디언 제리 랭포드를 납치해, 쇼 비즈니스 업계의 아성을 뚫고 쇼무대에 오르려고 하는 이야기이다.

루퍼트는 제리 대신 그의 쇼에 출연하여 학창 시절 아픈 기억을 소재로 스탠드 업 코미디를 펼친다. (다행히 그는 비장애인이라서 '스탠드 업' 상태에서 코미디를 할 수 있었다. ㅎ)

"나는 운동에 관심이 없었어요. 내가 했던 유일한 운동이라곤 애들한테 두드려 맞은 것뿐이었죠. 애들은 일주에 한 번씩, 주로 화요일에 나를 때렸어요. 얼마 후에 학교에서 구타를 정규수업으로 넣었더라고요? 날 때려눕히면 특별 점수를 받았죠. 그런데 한 불쌍한 아이가 날 겁내더라고요. 난 이렇게 말했죠. 어서 쳐. 왜 그래? 졸업하기 싫어?"

웃음을 주는 동시에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이런 걸 블랙코미디라고 하지 않나.


나도 일종의 블랙코미디를 하고 싶었던 거 같다. 내 유방암 농담의 의도는 이런 것 같다. 내가 내 병에 대해 명랑해진 만큼 내 주변 사람들도 심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쪽 유방만 있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긴 바랬던 거 같다. 더 나아가 성적 매력은 한쪽 유방만으로도 오케이이길 바란다. [그렇게 바버라는 앨런을 만났다]의 섹스씬을 보면 성적 매력이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몸에서 나오는 것 같지는 않다.

내 유방암 농담이 받아들여지는 그날까지 고고~. 그리고 내 안의 차별과 혐오를 어쩔 수 없다 변명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파내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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