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리복주 박풀고갱 May 06. 2024

아픔의 날씨 : 명랑한 암환자

2024.04.15. 오늘만 살기 좋은 날씨

미국 NBC에서 2016년부터 2022년 동안 시즌 6까지 방영된 [디스 이즈 어스 This is us]라는 드라마가 있다. 1980년대, 세 쌍둥이를 낳다가 아기 한 명을 잃은 백인 부부가 당일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흑인 아기를 입양한다. 그렇게 다시 세 쌍둥이 가족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세대에 걸쳐 담아낸 대하 드라마다. 백인 부부가 흑인 아이를 입양한 설정이라 삶 속에서 인종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흑인의 이발 문제 같은 생활밀착형 문제도 발생한다.

이런 장면도 있다. 세 쌍둥이의 첫째인 케빈(백인)이 조이(흑인)를 사귈 때 함께 여행을 가는데, 조이가 비단 베개를 갖고 오지 않은 걸 안타까워 하자 케빈은 이해하지 못한다.

흑인의 모발은 백인과 아시아인에 비해 가늘고 곱슬거리기 때문에 머리카락 끝까지 수분 공급이 잘 안 되고 머리카락 직경이 작은 부분에서 끊김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잘 때 비단 베개나 두건으로 건조함을 막는다고 한다. 흑인들의 생활감을 생생히 묘사한 드라마의 내용이 인상적이었고, 엉뚱하긴 하지만 항암을 하면서 떠올랐던 장면이기도 하다.


항암 주사를 맞고 보름 정도 지나니 머리카락이 좀 많이 빠지기 시작했다. 드라마틱한 빠짐 현상이 있는 건 아니어서 머리를 정말 밀어야 하나 고민했다. 꼭 한 번 밀어보고 싶긴 했으나 머리카락이 잘 자라지 않는 체질이라 머리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보내야 하는 소위 '거지 존' 시절이 길어질 거 같아 우려스럽기도 했다.

항암 치료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간호사 선생님이 100% 머리카락이 빠진다고 하셨으니 행여나 나는 안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했던 마음을 접고 과감히 밀었다.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했던 대사 "나는 오늘만 산다"를 외치려고 했으나 막상 바리캉을 갖다 댈 때는 까먹고 말았다.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빡빡머리 헤어스타일이 꽤 마음에 들었다. 머리 전체가 찍찍이가 되어 베개나 비니에 엉겨 붙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보드라운 솔 같은 느낌이 좋아서 자꾸 만지게 된다. 게다가 얼평을 절대 하지 않는 박풀고갱이 자려고 누운 내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하더라. ㅎㅎㅎ 박풀고갱을 만난 이후 귀엽다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ㅎㅎㅎ

'빡빡머리를 좋단다'하며 즐겁게 사나흘 정도 보내고 나니 문제가 발생했다. 5미리 정도의 머리카락 가시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머리숱이 많고 모발이 굵은 편이라 양도 양이지만 옷과 베개, 수건에 박히는 게 문제였다. 아놔. 보기보다 민감한 성격이라 까슬거리는 게 영 못마땅했다. [디스 이즈 어스]의 흑인 출연자들처럼 두건(보자기)을 쓰고 자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두건도 촘촘하게 직조된 것이 머리카락을 떼기도 쉽고 베개에도 덜 박힌다.

살면서 항암을 안 하면 좋겠지만 행여나 항암을 하게 된다면 처음에는 좀 많이 짧다 싶을 정도의 숏커트가 좋은 것 같다. 특히  머리숱이 많은 편이라면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머리카락 가시들을 처리하느라 일주일은 고생한다. 항암 4주가 지나면 머리가 거의 다 빠져서 더 이상 안 나오니 그나마 다행이다.


암이라는 단어의 무게 때문에 당사자보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안타까움이 더 큰 것 같다. 내 경우 암의 병세가 심각하지 않아서 명랑함을 유지할 수 있으니 감사하지 뭔가.

단 한 번 박풀고갱과 나의 분위기가 가라앉아서 무거움을 들킨 적이 있었다. 에스병원에서 간호사 선생님께 항암화학요법 교육을 받을 때였다. 항암의 부작용과 응급 상황 대처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데 방안 공기가 점점 처졌다. 주의사항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상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좀 두려워졌던 것 같다. 공기의 무거움을 감지한 간호사 선생님이 "이것저것 신경 쓰실 일이 많아서 힘드시죠?"라고 위로해 주셔서 금세 명랑함을 되찾긴 했다.


명랑한 건지 철딱서니가 없는 건지, 항암 바로 직전에 도쿄 여행을 계획했다. 항암을 시작하면 당분간 떠나기 힘들 것 같다는 게 박풀고갱의 복심이었다. 내일 종말이라도 오는 것처럼 오늘의 즐거움을 최대한 취했다. 항암 첫 진료 날, 의사가 항암을 당장 하자고 하면 뭐라고 변명을 해서 미룰지 박풀고갱이 내게 물었다.

"그냥 도쿄 여행 간다고 하면 되지."

"좀 부끄럽잖아."

"뭐가?"

"너무 암환자 같지 않잖아."

철없는 주제에 갑자기 암환자의 품격을 고려하다니 웃겼다. 다행히 종양 내과 의사 선생님은 내가 항암을 언제 시작할지 말지에 관심이 없었다. 항암 일정은 진료실을 나와 간호사 선생님이 따로 잡아 주셨다.

"아까 몸무게 재실 때 옷 입고 재셨죠? ㅇㅇ키로로 줄여 드릴까요?"

종양 내과 진료 전에 키와 몸무게를 재는데 아마 항암 주사액의 양 때문인 것 같다. 간호사 선생님이 아까 잰 결과보다 줄여서 기록해 줄까 물어보시는데 즉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치료에 영향이 있을까 봐 대답을 못한 것이 아니다. 옆에 앉아 있는 박풀고갱 때문이었다. 그동안 몸무게를 공개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공개가 되나 싶어서 좀 웃겼다. ㅋㅋㅋ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간호사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몸무게가 작으면 기분 좋잖아요."라고 하셨다.

"그럼요! 그럼요! (실제 몸무게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지만) 감사합니다."

다행인지 바보인지 박풀고갱은 내 몸무게의 숫자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나... 쩜.쩜.쩜...


(술을 못 마신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긴 하지만) 암에 걸려서 좋은 점도 몇 개 있다. 직장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 보험금을 받은 것, 뭘 해도 주변 사람들이 너그럽게 봐주는 것, 가사 노동을 거의 하지 않는 것 등 꽤 솔찬하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 맨]은 이름을 알 수 없는 '그'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그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조문객들이 그의 관에 흙을 한 줌씩 뿌리고 묘지를 떠난 후, 무덤 속에 혼자 남은 그는(그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나) 이미 죽었지만 회상은 할 수 있다는 듯,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가 살아온 인생이야기가 펼쳐진다.(3인칭 소설이지만 1인칭 소설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 이야기를 예리하게 풀어낸 [에브리 맨]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례적으로) 딱 한 번 소리 내어 웃은 대목이 있다.(웃기려고 쓴 것이 아닌데 웃었다면 필립 로스 작가님께 죄송하다. 웃음이 많은 것도 집안 내력인 것 같다.) 심장동맥 수술 후 회복 중인 그에게 의사는, 그의 아내가 그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퇴원을 시켜줄 수 없다고 이렇게 말한다.

"나도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부인 문제는 내 알 바 아니니까요. 하지만 부인이 면회 왔을 때 지켜봤어요. 그 여자는 기본적으로 없느니만 못한 사람이더군요. 따라서 나로서는 내 환자를 보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풀고갱에게 새삼 고마웠다. 유방암 수술 후, 그리고 항암 후 집에서 요양 중인데 박풀고갱의 간호는 훌륭한 편이다. 삼시세끼 밥을 챙기고 집안 청소도 깨끗이 하고 있다. 땡큐, 박!

매거진의 이전글 아픔의 날씨 : 의사 선생님 악보 좀 읽어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