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토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가치관
2024.02.22.
가슴을 잘라내 보니 알겠다. 가슴이 활을 쏘는데 방해가 된다고 오른쪽 가슴을 잘라냈다는 아마존의 여전사의 전설은 말 그대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일 뿐 사실이 아닐 거라는 걸...
일단 상처 부위가 생각보다 크다. 가슴골부터 겨드랑이 아래까지 가로로 길게 칼자국이 나는데, 지금은 적응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꽤 당황스럽다. ㅎ
학자들도, 아마존 여전사들이 가슴을 잘라내서 아마존, ‘a(부정)+mazos(가슴)’, 즉 ‘가슴이 없다’라는 이름을 얻은 게 아니라, 아마존이라는 이름이 먼저 있었고, 그 이름에서 유추해서 가슴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유방암 수술을 하면 배액관이라는 것을 겨드랑이 쪽으로 연결한다. 배액(排液)의 한자는 '밀어낼 배(排)', '진액 액(液)'으로 '진액을 밀어내다(배출하다)'라는 뜻이다.
절제를 했지만 원래는 조직이 있던 자리라서 조직액이 여전히 흘러나와 빈 공간에 고인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시간이 지나면 몸에서 흡수한다고 하는데, 수술 직후에는 몸에서 흡수하는 양보다 고이는 양이 많아서 부종이나 감염 등의 예방을 위해 배액관을 연결해서 바깥으로 빼내는 것이다. 수술 후 출혈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한다.
퇴원하는 날, 레지던트 선생님이 배액관을 빼주면서 겨드랑이 쪽이 붓거나 딱딱해지면 병원에 오거나 가까운 응급실로 가라고 하셨다. 간호사 선생님도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퇴원 후 1주일 동안은 통증이 거의 없었는데 2주가 가까워지자 흉터 부위를 양쪽으로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났다. 치과에서 잇몸에 마취 주사를 맞은 것처럼 상처 부위에 감각이 없으면서도, 있었다. 썩 유쾌한 감각은 아니다. 급기야 겨드랑이 쪽이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찌릿찌릿 아픈 것도 같다. 영 못 참을 통증은 아닌데 내 의식과 내 상처의 경계가 분명함에도 서로 엉켜있는 듯한 얄궂은 증상이다.
박풀고갱에게 겨드랑이 쪽을 보여주며 부었냐고 물어보니까... 분명 웃긴데 웃지 못할 대답이 돌아왔다.
"부은 건지 살인지 모르겠어. 수술하기 전에 살을 좀 뺄 걸 그랬어."
점. 점. 점.
2009년 개봉한 [거짓말의 발명]이라는 영화가 있다. 인류가 거짓말하는 법을 아직 모르는 세상이 배경인데,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을 할 줄 알게 된 시나리오 작가 마크가 주인공이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거짓말을 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사실까지 말해버려서 코믹함이 배가되는데, 박풀고갱 역시 거짓말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그 영화 속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냥 잘 모르겠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ㅎㅎㅎㅎ
호들갑을 떠는 게 위험한 것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결국 에스 병원에 진료 예약을 급하게 잡았다. 담당의사인 에이치 선생님을 만날 수는 (당연) 없었고 그날 진료 가능한 의사 선생님이 상처를 봐주셨다. 의사 선생님이 보기엔 정상적인 과정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료는 짧고 허무하게 끝났다. 이런 경우엔 허무한 게 더 낫지 뭔가.
감각이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이 얄리꾸리한 통증은 1년 정도 지속될 수 있다고 한다. (헐~ 생각보다 길군. ㅠㅠ)
이렇게 가슴을 잘라낸다는 것이 간단하지 않은데, 제 아무리 용맹스러운 아마조네스라도 활을 쏘기 위해서 가슴을 잘라냈을 리 만무하다.
안젤리나 졸리는 2013년 5월 14일, '나의 의학적 선택(My Medical Choice)'라는 글을 뉴욕 타임즈에 기고했다*. 유전자 검사 결과,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라서 예방적 유방 절제술을 받았다고 썼다. 졸리가 받은 수술은 가슴을 통째로 도려낸 것이 아니라 피부와 유두를 보존하면서 유방 내부 조직을 제거하고 이식을 통해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예방적 절제술은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비용적 부담도 크다. 안젤리나 졸리의 경우 비용은 별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암에 걸리지 않았는데, 양쪽 가슴 모두 절제 수술을 받았다니! 수술하다가 죽을 수도 있고 통증과 상처 동반이 수순인데 말이다. 졸리 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보다 다방면에서 월등히 뛰어나니까 무조건 언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의아하긴 했었다. 졸리의 선택을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으로만 본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지만 무엇이든 그렇게 단순할 리 없다.
알쓸신잡 1편에 정재승 박사와 유시민 작가가 냉동인간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내용이 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300년 동안 냉동인간이 되는 것은 노욕이고 어리석다고 유시민 작가가 말한다. 죽음을 품위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정재승 박사는 300년이 아니라 5년만 냉동인간으로 있고 그 후 치료가 가능하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한다. 과학기술의 토대가 바뀐다면 죽음을 대하는 가치관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정재승 박사의 의견이었다.
나 역시 유시민 작가와 비슷한 생각을 막연히 갖고 있었던 터라, 정재승 박사의 의견에 죽비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냉동인간이라는 것을 인간의 탐욕이라고 속단할 수 없는 것이다.
졸리의 어머니 마셀 버트런드(1950~2007)는 유방암과 난소암으로 10년간 투병하다가 56세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졸리의 어머니가 젊었을 때는 유전자 검사를 통한 유방암 발생 확률을 측정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졸리는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자유롭다. 선택이 가능하니까 선택을 한 것 같다. 물론 유방암을 예방하기 위해 절제를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졸리는 가장 적극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만약 유전자 검사 비용이나 예방적 유방 절제술이 의료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면,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유방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절제술을 받는 사람은 늘어날 것이다. 이 경우에도 나는 예방적 절제를 하지 않겠지만 과학이 더 발전하여 알약 한 알로 예방이 된다면 무조건 먹겠지. 졸리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 가타부타 의아해할 필요도 없고, 그럴 일도 아닌 것 같다.
졸리는 자식들의 자식들, 즉 손주들과도 좋은 추억을 나누는 할머니가 되는 것을 비롯하여 삶을 좀 더 오래 행복하게 만들어가고 싶어서 (죽음보다) 단호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졸리는 예방적 유방 절제술을 받은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거짓말도 아니고 말이다. 뉴욕 타임즈의 글에서 졸리는 유방암과 난소암의 가족력이 있는 여성이라면 적극적으로 정보를 찾고 예방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실제로 '안젤리나 졸리 효과'로 유방암의 가족력과 예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졸리는 자신이 가진 영향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고 그 힘을 제대로 사용했다. 굳이 받을 필요 없는 오해를 감당해야 하고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줄 알면서도 말아다. 이 언니, 정말... 월등히 멋지다. (언니 맞네!)
* https://www.nytimes.com/2013/05/14/opinion/my-medical-choice.html
Opening a conversation on women’s health.
www.nytimes.com
→ 번역은 다음 브런치 글 참고 https://brunch.co.kr/@eycho07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