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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복주 박풀고갱 Apr 20. 2024

아픔의 날씨 : 의사 선생님 악보 좀 읽어주세요

2024.03.20.(수) 항암을 해도 안 해도 불안한 날씨

1984년 개봉한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있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를 시기 질투한 궁정 악장 살리에리의 이야기이다.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생활고 때문에 모차르트가 작곡한 악보를 들고 살리에리를 찾아간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악보를 펼쳐본다. 그가 눈으로 읽는 음표는 소리가 되어, 관객인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린다.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살리에리는 천재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전문가였다.

살리에리가 음표를 보기만 해도 음악이 들리는 것처럼 의사들도 나의 의료 데이터를 읽으면 병증의 스토리가 보이는 전문가들일 것이다. 음표 까막눈이라도 연주자의 연주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듯이, 환자가 의학전문용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의사가 환자에게 알 수 있도록 설명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암 치료과정에서 심적 갈등이 많았던 처치가 항암화학요법이다.

암세포는 정상세포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암세포의 이런 특성을 이용하여 빨리 자라는 세포를 공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항암제이다. 그러다 보니 암세포뿐만 아니라 우리 몸에서 빠르게 증식하는 특성을 지닌 정상세포들도 함께 공격한다. 골수세포(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모근세포, 구강 및 항문의 점막세포, 생식세포 등이 빨리 자라는 정상세포들이다.

"너의 이름은 알 바 아냐. 빨리 자라는 건 무차별 공격이라고!"

골수가 공격을 받으니 면역력이 떨어지고, 머리카락도 빨리 자라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어서 빠지는 것이다.

수술로 다 잘라냈으면 됐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암세포 조각들을 없애기 위해서 정상 세포까지 망가지게 해야 할까 싶었다. 게다가 항암요법으로 암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환자는 20~30% 미만이라고 한다. 10명 중 2~3명 정도만 항암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숫자 아닌가? 10명 중 7~8명은 힘들게 항암치료를 받아도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있다니!!!


유방암 수술 후 첫 진료에서 에이치 선생님은 항암치료를 권하셨다. 꼭 받아야 하는 거냐고 여쭈었다. 항암치료의 효과 여부를 알아볼 수 있는 온코*프리 검사나 온코타입DX 검사를 해보고 결정할 수 있겠지만 비용이 200만 원에서 400만 원까지 드는 데다가 나의 경우 Ki 지수가 높아서 항암을 해야 하는 걸로 나올 거라고 하셨다. Ki 지수가 뭐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잘해주셨겠지만 잘 이해하지 못했다. ㅠㅠ

그리고 항암 치료를 진행할 종양 내과를 연결해 줄지 말지 나에게 물으셨다.

'내가 결정하라고?'

공이 나에게 넘어온 이상 심히 고민이 되었다. 째깍째깍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진료실 밖에는 또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박풀고갱이 나섰다. "일단 받자."


에이치 선생님의 진료실을 나와 유방암 수술 후 생활 안내를 받았다. 에스 병원 유방센터의 정규 프로그램인 것 같았다. 간호사 선생님이 샤워 방법부터 속옷, 음식, 여행, 운동 등 수술 후 일상생활 전반에 대해 세심하게 알려주셨다. (간호사 선생님 만세!)

이 안내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항암치료를 받을지 말지에 대해서는 3주 후 종양 내과 의사를 만나보고 결정하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림프부종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항암을 하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감시 림프절 절제만 하셨으니까 림프 부종 확률은 5%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본인이 걸리면 100%니까 조심하셔야 해요."

항암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단 1%의 재발률이라도 내가 걸리면 100%인 거니까.

박풀고갱의 이상한 회유도 한몫했다.

"암세포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깔끔하게 항암 받고 내년에는 가끔씩 술이라도 한 잔 하자. 암세포가 죽었다고 생각해야 술이라도 한 잔 할 수 있잖아." ㅎㅎㅎ


2024년 3월 20일, 종양 내과 엘 선생님을 만났다. 진료실 안팎에는 사전 동의 없이 녹음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엘 선생님은 환자인 나를 거의(어쩌면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모니터를 보며 암 사이즈, 항암 횟수, 항호르몬 치료 기간, 방사선 치료 여부 등등을 줄줄이 읊으셨다.

악수를 하려고 수줍게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철벽이 세워지는 기분이었다. 무엇이 이 젊은 의사를 이토록 방어적으로 만들었을까...

"에이치 선생님이 제 Ki 지수가 높다고 하시던데..."

"그래서 호르몬 양성 B 타입인 거고 항암을 하시는 거예요."

A4 사이즈의 1장짜리 유방암 치료계획을 받아 들고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다 써줬으니 더 이상 물어보지 마.'

음악도 공부한 사람이 더 잘 즐길 수 있듯이 자신의 병에 대한 공부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공부할 여력이 없는 사람도 있지 않겠나.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어느 정도의 학습 능력과 시간도 있어서 내 의무기록을 사전을 찾아가며 해석하고, 검색을 통해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에이치 선생님과 엘 선생님이 말한 Ki지수는 Ki-67 지수라는 것이었다. 암세포의 증식도(공격성)를 나타내는 지수이고 통상 20% 이상이면 높다고 판단한다는데 나는 80% 나 되었다. Ki-67 지수가 높으면 암의 재발률도 높아서 항암치료의 효과성이 유의미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온코프리 검사에 대해서는 내 수술 의사인 에이치 선생님의 해설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었다. 통상 5년 이내 전이 확률이 4% 이상이면 항암치료를 하는 쪽으로 결론을 낸다고 한다. 4% 라면 높은 수치도 아닌데 생명과 관계된 일이니 치료 계획을 보수적으로 잡는 것 같다.

공부 결과, 의사 선생님들이 내게 이렇게 말해줬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종양 크기가 3cm이고 림프절과 타 장기 전이가 없으니까 유방암 2기입니다. 암크기가 2cm에서 5cm이면 2기로 봅니다.

환자 분의 경우 호르몬 수용체 양성 암인데요.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에 의해 증식이 촉진되는 암이라서 항호르몬 치료가 필수입니다.

림프절 전이는 없지만 조직검사 결과 Ki 지수가 많이 높은 편이라 항암을 권해 드립니다. Ki 지수는 암의 공격성을 파악하기 위한 지표입니다. Ki 지수가 많이 높아서 항암 효과를 예측해 볼 수 있는 온코 검사를 해보셔도 항암을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날 거 같습니다.

온코 프리 검사의 경우 5년 이내 전이 확률이 4% 이상이면 항암을 하는 것으로 잡습니다. 만약 환자 분이 4% 이하라도 전이가 되면 100%나 마찬가지니까 하는 게 좋겠죠.

물론 선택은 환자 분이 하시는 겁니다.


의사 선생님들이 위와 같이 말씀하셨어도 부족하게 느껴지고, 막막하고 서운했을 수 있다. 몸이 병들면 정신도 함께 병이 들어 불안감이 커지고 약해지니까.

나의 경우 1차 항암 주사를 맞고 나서 심각한 부작용이 없었음에도 잠깐 의기소침이 왔다. 우울하지는 않았지만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 시간을 뭉터기 채로 흘려보내는 느낌이었다. 항암치료가 내게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온코 검사를 받은 환자들 중에 항암을 안 하는 걸로 결론이 났는데도 정말 안 해도 되는 건가 불안해하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그럴 수 있을 거 같다.

항암을 해도 불안, 안 해도 불안하다면, 하고 나서 불안해하는 쪽을 선택하는 게 맞다 싶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 후회하는 게 나은 것처럼.


1차 항암 주사를 맞고 3주 후에 종양 내과 엘 선생님을 다시 만났는데 이번에는 내 얼굴도 쳐다봐 주시고 설명도 잘해주셨다. (첫날은 단시간 내에 내 의무 기록을 훑어봐야 해서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나 보다. 역시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는 게 문제다.)

"주사 맞고 어떠셨어요?"

"생리통처럼 허리와 생식기에 통증이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어요. 항암 주사 후 백혈구 촉진 주사를 맞으셨잖아요? 그것이 골수에 작용하는 것이라서 허리가 아플 수 있습니다. 허리 쪽에 골수가 있으니까요."


에스 병원 의사 선생님들과 나는 향후 5년은 정기적으로 만나야 할 사이인데 신뢰도 점점 쌓이겠지.

항암에 대한 불안으로 내 영혼이 잠식 당해 좀 삐뚤어져 있었나 보다. 시간을 뭉터기 채로 흘려보내면서 멍 때리기를 좀 했더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거 같다. 역시 사람에겐 잉여 시간이 필요하다.


*온코(onco)는 종양을 나타내는 접두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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