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hospitality)할 여유가 없는 병원(hospital)
2024.02.08.
입원 전, 수술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른쪽 가슴 전체를 잘라낸다는 것뿐이었다.
입원해서 병실을 배정받기 전에 간호사 선생님이 통상적인 유방 절제 수술 절차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다. 병실을 배정받고 나서, 레지던트 선생님이 동일 날짜에 유방암 수술을 받는 사람들을 전부 모아 수술 방법에 대해 단체 교육을 해주셨다.
암 덩어리와 주변을 어느 정도 잘라낸 후, 긴급 조직검사를 해서 주변 살까지 전이가 됐는지 검사를 하고, 전이가 안 됐으면 절제는 그 정도로 끝내고, 전이가 됐으면 주변 살을 잘라내는 과정을 반복한다고 했다. 내 경우는 전절제라서 그런 과정은 없고 유방으로 연결되어 있는 림프절 전이 여부가 중요한 것 같았다. (이건 스스로 추리한 것인데 내가 받을 수술에 대해 개별적으로 설명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림프절은 우리 몸 곳곳에 영양소와 면역 항체를 운반해 주는 림프관들이 집결하는 인터체인지 같은 곳이라고 한다. 림프절을 조금 떼어내서 속성 조직검사한 뒤 암이 전이됐으면 겨드랑이에 있는 림프절 전체를 절제하는 모양이었다. 이 수술을 곽청술(郭淸術)이라고 한다. '곽'은 한자로 성곽 '곽'자인데 림프절을 의미하는 것 같고, '청'은 맑을 '청'자인데 청소, 즉 제거를 의미하는 것 같다. 곽청술을 시행하면 팔에 심각한 부종이 올 수 있다. 그렇지 않겠는가? 팔로 가는 림프관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가 없어져 버렸으니...
입원 당일, 에이치 선생님의 회진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알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와중에 질문하나를 성공했다.
"몽우리가 처음에는 작았는데 정말 확연하게 커졌고 표주박 모양이 되었어요."
"그럴 수 있어요. 뭐 전절제니까 상관없어요."
어차피 다 잘라낸다는 건 나도 알지만, 왜 그런지 알고 싶어서 물어본 건데... 혹시 그렇게 커지는 건 암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바보 같은 생각도 했고... ㅎㅎㅎ
다음날, 나는 오후 세 번째 수술이라서 전날 자정부터 오후 3시가 넘도록 물 한 방울 못 먹고 대기를 탔다. 혈관에 수액을 꽂고 있어서 그런지 힘들지는 않았다. 박풀고갱은 보호자용 침대에 앉아 OTT를 보며 '구운 감자' 과자를 두 상자나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었다. 굶고 있어서 그런지 감자 과자의 고소한 냄새가 코로 너무 잘 전달되었다. 상황이 너무 코믹해서 비실비실 웃음이 삐져나왔다. 귀여운 박풀고갱! ㅎㅎㅎ
수술실까지는 휠체어를 타고 이동했다. 침대에 누워 이동할 줄 알았는데, 유방암이 다른 병에 비해 위중도가 덜한 것 같아 나름 안심이 되었다. 수술방으로 가기 전에 그날 수술받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두는 광장 같은 곳에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휠체어에 앉아 내가 받을 수술 부위가 인쇄된 종이를 들고 대기하자니 실로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행여나 수술받다가 어떻게 되더라도 태어나기 전과 같은 거니까 괜찮을 거야. 내 장례식에서 눈물 흘릴 지인들을 생각하니 조금 슬퍼졌다. 워~워~워~ 성냥갑을 너무 조심스럽게 다루지 말자! 우스워지니까. ㅎㅎㅎ
드디어 수술방에 입성! 주변에 있는 모니터를 통해 오후 3시 50분이라는 걸 확인했다. 왠지 모르게 시간을 꼭 기억하고 싶어서 (새겨질 리 없지만) 머릿속 어드메에 시간을 각인했다.
수술방에 들어갔더니 에이치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오시겠지.......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폭이 좁은 수술 침대에 나를 눕히며 잡담을 했다. 수술 순서를 바꿔 달라고 하는 건지 수술 방을 바꿔 달라고 하는 건지, 수술대에 오른 나로서는 수술 순서가 밀릴까 봐 좀 불안했다.
최대한 이해를 해보면, 이 분들은 작업물이 사람일 뿐, 수 시간 동안 추운 수술방에서 험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스몰톡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마취의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며 가스 마스크를 씌웠다. 마스크를 한 터라 발음이 뭉개지는데도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대답했다. 다음날부터 설연휴니까 새해 인사를 한 것인데, 스스로도 TPO가 어긋난다고 느끼긴 했다. 어쩌겠나, 명랑함은 집안 내력인 것 같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수술방 밖이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의식을 확인하는 말을 걸어주신 거 같은데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이 드세요?"라는 대사는 분명 아니었다. 건조기에서 금방 나온 것 같은 시트를 덮어주셨는데 그 온기가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크게 심호흡을 해서 마취 가스를 뱉어내라고 했다. 절대 잠들면 안 된다고 했다.
수술이 끝난 사람들이 한 곳에 또 모여 있었다. 벽에 있는 모니터를 보니 오후 5시 7분이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한참을 기다렸다. 너무 크게 숨을 내뱉었는지 저쪽에 있던 간호사가 이제 소리는 내지 말고 숨을 쉬라고 했다. 들켰다. ㅎㅎㅎ 잠들면 못 깨어날까 봐 쫄았던 게 너무 표났다. ㅎㅎㅎ
병실로 돌아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이치 선생님이 다녀가셨다. 어떠냐고 한 거 같고 괜찮다고 한 거 같다. 에이치 선생님의 검정색 터틀넥이 멋지다고 생각했을 무렵 휘리릭 다음 환자에게로 가시려고 했다. 뭐라도 물어봐야 해!
"림프절도 뗐나요?"(림프절에 전이가 되었는지 물었어야 했다!)
"네."
"아... "
뭐 하나는 더 물어봐야 해!
"비행기는 언제부터 탈 수 있나요?"
"제주도 사시나요?"
"아뇨. 혹시나 해서... (사실은 빨리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바로 타실 수 있어요."
비행기를 바로 탈 수 있다니 희소식이었다.
에이치 선생님은 에스 병원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분으로 많은 환자들이 진료받기를 원한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콜센터 상담원이 연결해 줬다. 비행기의 동일 노선을 다른 사람들보다 싸게 구입한 거 같아 처음에는 되게 기뻤다. 그런데 이코노미가 비즈니스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1등 국적기에 빽빽하게 끼여 앉아 가는 것보다, 비교적 좌석이 널널하다는 아랍권 항공기를 타고 빈자리에 누워가는, 일명 '눕코노미'가 훨씬 좋지 않겠나 싶었다.
성서에는, 강도를 당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사제와 사회 지도층은 외면하고 지나쳤는데 '개'라 불리며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도와줬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심리학자 존 달리와 대니얼 베이트슨은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Good Samaritan Experiment)'을 했다.
프리스턴대 신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 미션을 주면서, 한 집단에게는 설교 주제로 '선한 사마리아인'을, 다른 집단에게는 자유 주제를 주었다. 그리고 설교를 해야 하는 예배당으로 가는 길목에 습격을 당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배치했다. 쓰러진 사람을 도와준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완전히 다른 양상의 결과가 벌어진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돕는 비율을 결정했던 것은, 설교 주제와는 상관 없이, 설교 시작 시간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느냐였다. 시간에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의 63%가, 늦지는 않을 정도의 시간이 남은 사람들의 40%가, 늦거나 시간이 임박했던 사람들의 10%가 쓰러진 사람을 도왔다.
에이치 선생님은 너무 바빴고 여유가 없어 보였다. 혼자서 감당해야 할 환자수가 너무 많은 것 같았다. 내 주치의라고 하는 레지던트 선생님도 너무 바빠 보였다.
디즈니 플러스의 드라마 [더 베어]는 죽은 형이 남긴 망해가는 식당을, 미슐랭 스타를 받는 식당으로 되살려보려는 유명 세프 카르멘과 그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시즌 2의 7회에 보면, 미슐랭 3 스타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개릿(Garrett)이라는 인물이 식당과 병원의 공통점으로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를 말하는 장면이 있다.
"한 상사가 최고 수준의 서비스는 병원에서 일하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식당이나 병원이나 직업 정신은 같다고 생각해요. 남을 돌보는 거죠. (I used to work for this guy who used to say that taking care of people at the highest level was like working at a hospital. I think that’s why restaurants and hospitals use the same word, ‘hospitality.’)"
병원의 영어 단어 hospital은 라틴어 hospitalia(객지 사람이나 손님을 위한 숙소), hospes(방문객 또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사람)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에스 병원을 비롯한 내가 가본 우리나라 병원들은,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 즉 환자를 정성껏 대하고 환대(hospitality)하기에는 여유가 너무 없었다. 점. 점. 점.
나의 경우 림프절은 조직검사용으로만 떼냈다는 것을, 입원 기간 동안 혈압을 재고 약을 챙겨주신 간호사 선생님이 알려주셨다. (간호사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수술 후 2주가 훨씬 지났을 때, 의무기록사본증명서라는 것을 어느 블로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의무기록사본을 읽어보니, 내가 받은 수술은, 수술 전에 이미, 전절제와 감시 림프절 생검(TM SLNB*)으로 계획되어 있었더라. 수술 전에 레지던트 선생님이든 전문의 선생님이든 한마디만 해줬으면 좋았을 걸.
"림프절은 일단 조직 검사 용도로 떼낼 예정이에요."라고...
아니, 수술 후에 한마디만 해줬으면 되었는데...
"림프절은 조직검사용으로만 떼냈어요."라고...
림프절을 겨드랑이까지 덜어냈는지 아닌지 여부에 따라 내 몸이 입는 데미지와 부작용의 격차가 엄청난 데 비해, 의사 선생님들은 너무 바쁘셔서 너무 무심했다. 친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질문에 대답은 잘해주셨으니까. 그런데 좋은 대답을 받으려면 환자가 그만큼 공부해야 했다. 공부를 안 하니까 환자인 것이지, 의사가 되고 싶었으면 공부를 했겠지.
수술 전에 정말 많은 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에 대해 아무도 설명을 안 해줬다.
의무기록을 보니, 나의 경우, 유방 MRI 검사 등으로 림프절 전이 가능성은 낮다는 걸 의사들은 알고 있었는데, 검사의도 전문의도 주치의(레지던트)도 아무 말을 안 해줬다. 림프절 전이가 의심되면 수술 계획 자체를 액와 림프절 곽청술*로 잡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 나도 결국 공부를 좀 하고 말았다.)
내 의무기록을 사전을 찾아가며 살펴보니 좀 서운했다. 환대(hospitality)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말이나 좀 해주지...' 환자들이 자신의 의무기록사본으로 공부까지 해야 한다면 증명서 복사 비용이나 낮춰주든지.
병원에 가보면 알겠지만 의사들이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구조가 안 보인다. 컨베이어 벨트로 운반되어 오는 작업물이 사람이니까 친절하게 대하긴 하지만 컨베이어 벨트 속도가 너무 빨라서 쳐내기도 버겁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이 제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의사들이 병에 걸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환대(hopitality)할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제도적 정책적 뒷받침을 통해서 의사 수는 늘리는 게 확실히 좋을 것 같긴 하다.
* TM SLNB : Total mastectomy(전절제) with Sentinel Lymph Node Biopsy(감시 림프절 생검)
* Axillary Lymph Node Dissection(액와 림프절 곽청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