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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복주 박풀고갱 Feb 25. 2024

아픔의 날씨 : 죽는 건 태어나기 전과 같겠지

2024.01.06. 되돌릴 수 없는 날씨

이제 뼈스캔 검사 후 수술만 하면 유방암에 대한 주요 처치는 끝난다. 뼈스캔이 2024년 1월 6일이니까 수술 날짜까지 한 달 여를 기다려야 한다.

칼 세이건은 시간이 무엇인가의 흐름이 아니라고 말했다.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우리는 시간 안에 갇혀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미래로 시간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가만있어도 수술 날짜는 다가올 것이니까 해야 할 일은 하루하루 미래를 알차게 만나는 일밖에 없다.

박풀고갱은 당분간 긴 여행을 하기 힘들 테니까 어디라도 떠나자고 했다. 준비가 부족하니 패키지여행을 알아봤다. 급하게 뉴질랜드 쪽을 찾아봤는데 1월이 성수기라 마음에 맞는 상품을 구할 수 없었다. 뉴질랜드는 다음에 자유여행으로 느긋하게 다녀오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이집트 10박 11일.

뼈스캔이 오전이니까 검사를 끝내고 밤 비행기로 떠날 수 있는 점도 마음에 쏙 들었다. 자유여행으로 갔으면 30일은 돌아야 할 여정을 10일에 끝내고 돌아왔다.

홍해에서 스노클링을 한 경험이 무엇보다 좋았다. 추울까 봐 망설였는데 하길 잘했다. 그동안 다른 여행에서 많이 후회했던 일들이 모두 물과 관련이 있어서 용기를 냈다. 일본 시라카와고 마을에서 대중목욕탕에 안 들어간 것, 핀란드 킬로파에서 얼음 목욕 및 사우나를 안 한 것, 베트남 하롱베이 크루즈에서 수영을 안 한 것, 몽골에서 우박을 맞으며 온천욕을 못한 것 등이다.

홍해에 들어가길 너무 잘했고, 물을 엄청 싫어하는 박고양이 박풀고갱도 함께 입수해서 너무 좋은 추억이 되었다. 안 들어갔으면 또 후회할 뻔했다. 이제 후회는 그만해야지.


이집트에서 돌아오고 며칠 안 지나 부산 고향집에 갔다. 아버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아버지는 음력설과 가까운 날짜에 돌아가셔서 기제사만 지내기 때문에 매년 설에는 고향집에 가지 않는다. 이번 설에는 수술을 받아야 하니까 더 잘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죽음을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한 때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을 때도 있었으나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오면서 원거리 특혜를 좀 받았다. 가족이란 게 참 신기한 것이, 가까이 있을 때는 지지고 볶더라도 떨어져 있으면, 없던 애틋함이 좀 생기더라. 내 또래의 부모들이 대부분 그랬듯 우리 엄마 아버지도 마흔 줄의 딸이 어서 빨리 결혼을 해주기를 바랐다. 한 번은 아버지가 나를 결혼 중매 회사에 등록하려고, 어떤 업체에 전화를 해서 나의 신상정보를 불러줬다고 한다. 나이, 학력, 출신 학교 등등 객관적인 정보들을 무난히 알려줬는데 그쪽에서 외모에 대해 물어봤던 거 같다. 아버지는 지체 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외모는 특 A급이지요."

띠로리~

그렇다. 우리도 고슴도치 가족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 결혼을 위한 상견례 직전에 돌아가셨다. 전립선 비대증 시술 후 급작스런 패혈증이 원인이었다. 상견례를 위해 서울에 오는 길에 소변이 자주 마려울까 봐 시술을 받으신 거라고 한다. ....... .......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부산으로 가는 KTX 안에서 가늠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으면서도 한 영화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바로 전날 나오미 와츠와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더 임파서블 The impossible, 2013년 1월 17일 개봉]을 봤는데 2004년에 실제로 일어났던 대지진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태국에서 휴가를 즐기던 4인 가족이 쓰나미를 만나 뿔뿔이 흩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이야기인데, 이런 요약은 언제나 차갑다. 이 가족이 맞닥뜨린 공포와 고난은 단 한 줄로 요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오미 와츠가 연기한 마리아는 나뭇가지와 각종 잡동사니에 찔려 엄청난 상처를 입지만 살아난다. 마리아가 부상당하는 모습이 너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는데, 목숨이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질긴 것인가 보다. 더군다나 실화라니까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가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도 살았으니 아버지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영화 제목이 '더 임파서블'이잖나. 불가능한 기적이 벌어졌으니 영화로 만들어졌겠지... 아버지는 내가 부산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돌아가셨다.

응급실에서 뵀을 때 요구르트가 먹고 싶다고 하셨는데 병원에서는 물 한 방울도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사다 드릴 걸.... 한동안 요구르트를 보면 눈물이 났다.

사실 나는 장기전이 될까 봐 걱정했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기셨을 때 '오랜 병수발에 효자 없다'는 말을 떠올렸다. 앞서 언급한 [더 임파서블]이라는 영화를 떠올리며 아버지도 쉽게 돌아가시지는 않을 거라 거의 확신했었다. 가족들 모두 마음 단단히 먹고 오랜 병간호에 지치지 않을 각오를 해야 할 거라 생각했다.

병원 복도에서 쪽잠을 잔 우리 4남매는 중환자실 면회시간이 되기 전에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나가기 전에 중환자실 간호사 선생님께 상태를 물어보니 혈압이 조금 올랐다는 희소식을 알려주셔서 조금 안도했다. 면회시간이 아니지만 잠깐 뵐 수 있겠냐 사정해보고 싶었지만 민폐인 거 같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병원 근처 식당에서 한 술을 뜨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고...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가니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이미 가망이 없었을 텐데도 우리 가족이 포기할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심장 마사지를 계속해주신 의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심폐소생술 장면이 나오는 TV드라마나 영화를 보기 힘들었다. 모기를 죽일 때도 숨이 거둬진다는 것이 무얼까 싶어서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침밥을 왜 먹으러 갔을까 후회도 많이 했다. 숨을 거두기 바로 직전까지 아버지가 정말 외롭고 무서웠을 것 같아서 마음이 스산했다. 민폐가 되더라도 중환자실 면회시간은 아니지만 들어가서 잠시만 보고 나오겠다고 진상을 부릴 걸 하는 생각도 했다.

이런 후회가 산 사람의 넋두리일 뿐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고 싶어서 감정을 소모하는 짓을 자주 했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은 되돌릴 수 없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시간 여행은 미래로만 열려 있으니, 몇 달 후, 나와 박풀고갱은 결혼을 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술친구를 만났으니 참 많이도 술을 즐겼다.

박제하고 싶은 행복한 순간들이 많다. 함께 텔레비전을 볼 때, 세상사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 꼴 보기 싫은 정치인을 함께 욕할 때, 유명 세프의 레시피로 요리를 해서 나눠 먹을 때, 영화와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압도적인 풍경을 함께 바라봤을 때... 많은 순간을 술과 함께 해서 즐겁고 행복했다.

유방암의 원인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유력한 후보가 술과 비만이라고 한다. 즐겁고 행복했던 만큼 암과 죽음에 다가가고 있었던 셈이다.

술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다. 정말 많이 즐거웠고 정말 많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다만 행복감과 함께 죽음의 공포가 닥쳐올 때도 그만큼 많았다. 행복한 순간순간마다 죽음을 더 가까이 느꼈다. 그때마다 '츄야 코야마' 작가의 만화 [우주형제]를 떠올렸다. 뭇타와 히비토 형제는 어린 시절, 우주비행사가 되어 달에 함께 가자고 약속을 하지만 동생 히비토만 먼저 우주비행사가 되어 달에 간다. 형이 그 뒤를 좇아 우주비행사가 되어가는 이야기인데, 전문성과 재미를 함께 갖춘 수작이다. [우주형제] 8권 <#76> '천국에서 지옥' 편에 이런 대사가 있다. 우주 비행은 생명이 위험한 경우가 많으니까 선배 우주비행사인 브라이언이 히비토에게 이렇게 묻는다.

"히비토는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될 거 같아?"

히비토는 이렇게 대답한다.

"글쎄.... 모르겠는데.... 태어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

"그럼, 천국이나 지옥은?"

"난 없다고 생각하는데, 둘다."

"왜?"

"천국이든 지옥이든 모두 다 살아 있는 때 보는 거잖아."


죽음이 태어나기 전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평온해진다.



* 시간은 무엇인가의 흐름이 아니다. 우리는 흐름을 측정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한다.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어떻게 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시간 안에 갇혀 있고, 우리 각자는 매년 1년씩 미래로 시간 여행을 한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여행할 수 있다면 주어진 시간 안에 더 먼 미래로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로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을 만들 수는 있지만 과거로는 갈 수 없을 수도 있다.

- 칼 세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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