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리복주 박풀고갱 Feb 21. 2024

번갯불에 콩도 안 익을 날씨

건강보험 만세!

2023.12.01. 


3차 병원 진료 날짜를 기다리며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 좋아하는 술을 몇 잔 걸치는 날도 있었다. 물론 내 몸에 암이 자라게 것에 대한 양심이란 게 내게도 있으니까 술을 확실히 줄이긴 했지만, 술 몇 잔 더 마신다고 암 덩어리가 무럭무럭 자리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주변에 내 병을 알리는 일도 조금씩 했다. 

'암'이라는 단어의 무거움 때문에 최대한 가볍게 전달하고자 했다. 아픔을 숨기고 눈물을 삼키며 애써 밝은 척한 적은 결코 없다. 실제로 나는 명랑했다.

"나 암에 걸렸대. 괜히 검사했어. 검사 안 했으면 술도 맘껏 마시고 좋을 텐데..."

여동생에게는 페이스 타임으로 알렸는데, 여동생이 울기 시작하는 바람에, 진정 좀 시켜달라고 여동생의 남편을 바꾸라고 했더니, 그도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 정말 웃음보가 빵 터졌다. 그렇게까지 울 일인가? 동생이 좋은 사람과 결혼한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주 만나는 과후배는 "저도 무서워서 건강검진 안 하잖아요. 모르고 사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라고 했다.(이 반응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돈을 보내주는 선배도 있었고, 보양식을 사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엄마에게만은 알리지 않았다. 그녀의 상심은 그녀의 몫이겠지만, 내가 불쌍하다고 계속 울고 불며 나에게 스트레스 줄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알릴 수 없었다. 엄마, 미안!


유방암 선배인 친구는 에스 병원에 가기 전에 영상의학전문병원에 가서 유방 MRI를 미리 찍어서 촬영본을 들고 에스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절차를 줄이고 빠른 치료를 위해서 필요할 거라고 했다. 난 '그러마' 대답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가야 할 병원을 늘리는 것도 싫었고, 그 병원에서 서류를 떼서 에스 병원에 제출하는 것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런데 결국 그 친구가 추천한 영상의학과에 예약을 했다가 취소하는 난리법석을 치렀다. 유방암 산정특례 적용 전이라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산정특례란 암 치료에 드는 비용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건강보험에서 진료비의 95%를 부담해 주는 제도다. 건강보험 만세!

그 친구에게는 실손의료보험이 있어서 MRI를 미리 찍어도 비용 보전이 되었던 것인데, 내게는 실손의료보험이 하나도 없다. 주변에서 실손의료보험의 혜택을 칭찬하며 내게도 꼭 들어두기를 권한 적이 많았었는데 별로 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실손의료보험이 과잉 진료를 부추기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병의원 이용은 OECD 평균 세배에 가깝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실손보험의 영향도 있다. 비급여진료의 폭증은 건강보험 재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비급여진료와 함께 급여 진료도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건강보험의 부담이 느는 것이다. 

다 떠나서, 나는 병원에 자주 가는 것이 싫기 때문에 실손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것 같다. 치명적인 것은 건강보험에서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다. 실제로 건강보험에서 해결해주고 있다. 유방 MRI의 진료비 총액이 619,091원인데 내가 낸 돈은 33,300원이다. 다른 검사들은 1만 원 안팎이었다. 외래 진료비는 1,200원 밖에 안 낸다. 건강보험 다시 만세!


2023년 12월 1일, 에스 병원에 진료 예약 시간보다 1시간 이상 빨리 도착했다. 1년 가까이 백수생활을 하느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늦으면 안 될 거 같은 압박감이 일어서 일찍 갔다. 

병원은 넓었고 미로처럼 복잡했다. 바닥에 난 화살표를 따라가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물어물어 유방외과에 도착했다. 접수, 초음파영상CD 등록 등 많은 부분을 키오스크로 해결해야 했다. 나이가 들수록 대인기피 성향이 짙어져 비대면이 편할 때가 많지만 키오스크는 언제나 사람을 초조하게 한다. 

키오스크와 대화를 무사히 마치고 에이치 선생님 진료실 앞에 앉았다. 명성이 높다더니 진료실도 2개나 사용하시고 대기 명단에 뜬 환자 수도 다른 의사 선생님에 비해 월등 그 이상으로 많았다. 예약한 시간보다 삼사십 분 지체되어 그 유명한 에이치 선생님을 알현했다. 촉진 후 두 마디 하셨다. 

"작을 때 잘 오셨네."

"수술해야 합니다."

뭘 물어볼 새도 없이 진료가 끝나버렸다. 이 정도면 번갯불에 콩도 안 익을 시간이다. (사실 뭘 물어봐야 할지도 잘 모르겠더라.)

다행인 것은 내 진료만 빨리 끝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다음 진료일인 2023년 12월 18일까지 해야 할 검사가 무지 많았다. 혈액, 소변, 흉부 X-ray, 심전도, 유방 MRI, 유방 초음파, 뼈스캔... 검사일정이 많이 밀려 있는지 뼈스캔은 해를 넘겨 2024년 1월 6일에 잡혔다. 의료의 서울 집중화 현상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