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히 퍼지는
2023.11.21
오른쪽 가슴에 생긴 멍울 때문에 죽음에 대해 온갖 망상을 하면서도 병원에 가는 건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모르는 게 약이지 않을까? 이대로 둬도 여태 별 문제없었던 것처럼 10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벌써 50대이니 10년 후 죽는다고 해도 크게 서럽지는 않을 듯했다.
죽는 것도 두렵지만 아프게 죽을까 봐 병원을 찾았다. 어쩌면 암이 아니라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다. 초음파 검사 결과 혹의 모양이 안 좋아서 9일 뒤 조직검사를 하자고 했다.
9일 뒤면 미리 계획해 둔 상하이 여행일정과 겹쳐서 조직 검사는 그다음 주로 미뤘다. 나보다 먼저 유방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 중인 친구는 다른 병원에 가서 어서 빨리 조직 검사를 받으라고 조언했지만 암이 며칠 사이에 마구 자라거나 퍼지지는 않을 거 같았다. 다른 병원을 찾아야 하는 일도 막막했고, 조직검사를 받고 여행을 떠나면 검사로 인한 상처 때문에 그 좋아하는 술을 못 마실 거 같았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식으로 말하면, 죽음에 대한 나의 온갖 망상은 바보스럽고, 병에 대한 나의 태도는 위험한 것 같다.
조직검사 결과는 안 좋았다. 의사는 진료의뢰서를 써주며 1주일 내에 3차 병원 예약을 잡으라고 했다. 진료의뢰서에는 invasive ductal carcinoma라고 쓰여 있었다. 'invasive'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급속히 퍼지는'이라는 뜻이 있다.
'급속히 퍼진다니... 흠... 좀 무서운데?'
의사는 침습성 또는 침윤성 관암(주변 조직을 침범한 암)이라고 설명했을 뿐 급속히 퍼진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었다. 'invasive'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일 뿐일 거라며 내 마음 편한 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3차 병원은 집에서 가까운 에스 병원으로 정했다. 항암 중인 친구가 에스 병원 유방 외과는 에이치 선생님이 가장 유명한데 이름값만큼 예약을 잡기도 힘들 거라고 했다. 에이치 선생님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아무나 가장 빠르게 예약할 수 있는 분을 해달라니까 에이치 선생을 연결해 줬다. 뭐가 이렇게 순조롭지? 동일 노선의 비행기 티켓을 남보다 싸게 구입한 것처럼 기뻤다.
3차 병원 진료를 예약하고 나니 비로소 암이라는 병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3일 후, 직장 면접을 앞두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불참 의사를 밝혀야 할 거 같았다.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면접에 못 가게 되었다고 했다. 솔직히, 병에 걸려서 가장 좋은 점이 이 부분이다. 직장을 다시 안 다녀도 된다는 거.
2022년 다니던 직장이 폐쇄되고 2023년 한 해 동안 잘 쉬고 잘 놀았는데, 당연히 더 놀고 싶었다. 야호!
그렇다. 나는 인생의 성냥갑을 함부로 다루는 편인 것 같다.
*앞선 글( https://brunch.co.kr/@na-show-mon/174 )에서 '라쇼몽'의 작가로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인생은 한통의 성냥갑과 닮았다. 중대하게 취급하면 바보 같고, 함부로 다루면 위험하다.'고 했다고 소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