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본 욕구가 애정욕구라고 하지만 그 애정욕구가 기본적으로 채워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욕구를 채우고자 각자만의 방식을 만들어 낸다. 누군가는 아픈 것으로, 누군가는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또 누군가는 착한 행동을 해서, 혹은 폭력을 행사하든. 건강하지 않고 부적응적인 방식으로 관심을 받고자 한다.
내가 개발한 방식은 '과장되게 표현하는 슬픔'이다. 내 슬픔을 더 크게, 과장되게,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표현하는 것으로 관심을 끌어오기도 했고, 여전히 그런 모습들이 발견되기도 하다. 물론, 나 또한 객관적으로 봤을 때 슬퍼하고, 우울해할 때도 있겠지만, 그 보편적인 감정을 조금 더 특별하게 과장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다.
사람들은 그런 나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위로하는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일정 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때에 관심받고 있다고 느끼기에 그렇다.
그 시간과 감정을 함께 공유하며 마음을 나누고 관계가 조금 더 깊어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어떤 이는 그런 내 모습을 지겨워하며 끔찍이도 싫어한다. 결국, 관심받고자 했던 행동이 오히려 상대방의 관심을 철수시키는 꼴이 돼버린 것이다.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물건으로서 '사용'당하는 기분을 겪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내 옆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너무 싫다고. 하지만 가볍게 흘려듣고, 무시하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는 게 나이기도 하다.
가볍게 듣는 이유는 진짜 보통의 나를 인정하기 싫은 거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다고 들어왔던 오빠 밑에서 아무것도 잘하지 못하는 나는 무엇인가 특별해져야만 했다. 부모님들은 막내딸이라고 온갖 애정을 주고 챙겼겠지만, 내 주관적인 느낌에서는 타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지 않으면 내게 돌아올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내 힘듦을, 슬픔을 더 크게 표현해오며 불쌍하고 챙겨줘야 하는 사람으로 위치해 관심을 끌어왔다.
그렇다고 내 슬픔을 무시해도 되는 감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의도에 대해 불순한 태도가 있었다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 기본적인 욕구를 애쓰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충족되어 왔다면 애정 끌기 방식은 새롭게 만들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애정 받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가 느껴졌다면 각자만의 관심 끌기 방식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상황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단점이 특별하고, 자신이 자라온 환경이 남들과 다르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네가 뭘 알아. 넌 몰라.'라는 태도를 일관하며 스스로를 특별한 위치에 올려놓고 상대방을 무시한다. 그러니 상대방의 말이 들릴리가 없고, 스스로의 철수. 스스로 소외시키는 상황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얼마전에 집단상담 중, 한 집단원이 "난 쓰레기야. 내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말해줄게."라고 말하자, 그 옆에 있던 집단원이 이렇게 말을 했다.
"나도 쓰레기야. 다행이다. 너도 쓰레기고 나도 쓰레기고, 우리 둘이 더 편안하게 관계 맺을 수 있겠다.”
그러면서 맞네. 맞네. 하면서 다같이 웃었다.
나도 인정을 해야 한다. 나도 보통 사람이다. 보잘것없는 내 모습이나, 무능력한 내 모습이나, 매력 없고 특별하지 않는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방의 관심과 위로, 격려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가볍지 않게 상대방의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래야만 하는 때가 왔다.
- 개같이 사는 인생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징글징글한 누다심 센터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느끼는 바를 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