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기 전에 생각하던 부부의 상이 있었다. 부모님을 보며 ‘나는 절대로 아이들 앞에서 싸우지 말아야지.”, “절대로 참으며 살지 말아야지.”, “내 할 말 하며, 내 권리 찾으며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상담 공부를 하고 상담을 받으면서, 그리고 내가 상담자로 일하면서는 남편과 내 관계가 제일 우선이고, 자식은 그다음. 가족 간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삶을 살지 않겠다며 다짐했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소통하며 대화하기를 포기하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내가 생각하는 부부의 상을 완성하기 위해 내 배우자가 될 사람은 나와 뜻이 같아야 했고, 내 생각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야 했다. 이것저것 따지며 매의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되었다. 내 구미에 딱 들어맞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어쩌다 아이가 먼저 생겨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준비하는 동안 골머리를 썩었다. 이제껏 만났던 사람 중에 최악이었다. 하필 최악의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다니 절망스러웠다. 아마 결혼하면서 둘 다 밑바닥을 보게 되어 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앞이 까마득했다. 그래도 임신 중에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대화도 시도해보고 이해해보려고 노력도 하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서도 그 노력은 변함이 없었지만 일 년, 이년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는 내 생각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상대를 바꾸기 위한 갈등이었지만, 이제는 그냥 내 생각을 바꿔 살면 되겠다 싶었다.
남편은 바뀌지 않는다. 첫째 그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남편 욕을 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모습에 대해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 하나 참고 사는 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불쌍하지도, 비참하지도, 한심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생색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살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뿐이다. 남편이 답답하고 죽이고 싶다가도, 측은한 마음도 든다. 그래서 마음으로 품게 된다.
그러다 가끔씩 우울해졌다. 그래서 또 한 번 생각을 바꾸게 됐다. 돈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 전에는 좋은 옷, 좋은 차.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것들이 필요도 없고, 과분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내 남편은 육아도 살림도 안 하고 대화도 안되지만, 돈은 착실히 열심히 벌어온다. 딱 그것만 하니, 그 이점을 살려 즐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차로 바꾸기로 하고, 봄옷도 (내 수준에서) 비싼 것들로 샀다. 신이 났다. 이렇게도 살아도 살아진다는 것을 또 한 번 체험하게 되었다.
지금 나의 모습은 내가 이전에 계획하거나 생각했던 그 모습이 아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잘못된 피상적인 관계라 생각했다. 그런데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나. 지금 이 ‘환경’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조금이라도 더 즐길 수 있는지 알면 되지 않나.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하니까. 그리고 하나의 기준으로 이를 벗어나면 잘못된 삶을 사는 것처럼 재단하는 게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 거니까 말이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사람을, 나를 진짜로 알아가는 것 같다.
나란 녀석, 생각보다 더 괜찮은 것 같다.
(물론, 잔소리해대는 누다심 센터 식구들이 있어서 가능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