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착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은 진짜 착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마다 제각기 끌리는 사람이 다른 것 같다. 매력을 느끼고 호감이 가는, 특정 유형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어떤 특성에 대해 유독 끌리기도 한다. 다소 어수룩하고 순박하며 투박한 매력을 가진 사람들. 어떻게 보면 어리바리해 보이기도 하고, 놀리거나 장난치고 싶어 지는 그런 매력의 사람 말이다.
어수룩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만큼 내가 보호해주거나 감싸주고 챙겨주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게끔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직업적인 측면에서는 똑 부러지나 정서적인 측면에서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사람일 경우 내가 힘이 되어 주고 싶은 경우가 있는 듯하다.
내가 좋아라 하는 사람의 유형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착한 사람’이라는 평을 많이 듣기도 한다. 한 다리 건너서 관계를 맺을 경우 이런 ‘착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지만, 그 착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착한 사람이 있으면, 꼭 나쁜 사람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에서 보는 착한 남편과 악덕 부인이 그러한 관계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착한 남편은 우유부단하고 거절을 잘 하지 못하여 밖에서 손해를 보는 일이 잦다. 보증을 서거나 돈을 빌려주고, 혹은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우유부단하게 처신하여 부적절한 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부부의 역할에서 남편이 제 역할을 똑바로 하지 못하니, 부인은 이중 삼중으로 야무지게 혹은 독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곱디고왔던, 순하디 순했던 새색시는 이렇게 점차 드센 아줌마가 되어가는 줄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부드럽지 못하다고 핀잔주겠지...
만약 자신의 아내가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여자로 나이 들어가길 바란다면 본인이 좀 더 나쁜 사람이 되어 자신의 가정을 강건히 지켜 세상 풍파로부터 아내를 보호하거나 혹은 동반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더 작게는 연인 관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특히, 헤어짐을 고할 때 마지막까지 자신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본인이 상대에 대한 마음이 식었거나 다른 사람이 생겨 현재 진행 중인 연인과 이별을 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이별의 이유가 상대를 위한 배려라고 떠들어댄다.
‘널 위해 놓아주는 거야... 섭섭해하며 힘들어하는 너를 붙잡아 둘 수 없어.’
더 나아가서는 관계의 상태에 대해 상대에게 묻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지금 소원해지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우리가 더 이상 관계를 진전시킬 수 없는데 넌 어떻게 하고 싶니?’
참 끔찍한 말이고 잔인한 질문들이다. 지금 이 관계를 끝내는 이유가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끝끝내 부인하며 상대에게 탓을 돌리는 것이다. “나는 헤어질 마음이 없는데 내가 힘들까 봐 날 위해 헤어져 준다니...” 그러한 헤어짐을 선고받은 나는 원망이나 ‘탓’ 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혼자서 더 힘들어할게 분명하다. 정말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본인이 나쁜 사람이 되어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에서 이별을 고해야 한다. 선택권을 상대방에게 넘기는 배려를 하지 말고, 본인이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 그런 능동적인 이별 통보야말로 당신이 말로만 뻔지르르하게 내뱉은 그 '배려'라는 행동인 것이다.
가장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욕구는 ‘애정’ 욕구이다. 마음의 병이 생긴 사람들은 대부분 애정이나 인정 욕구가 좌절되어 발생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또한 부모나 교사, 혹은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컸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에 매우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표현을 하여 자신의 것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허나, 이러한 과정에서 주요한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죽여야만 했던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상대가 좋아할 만한 감정을 표현하거나 행동을 하게 된다. 어렸을 때의 이러한 패턴이 자리를 잡게 되면 성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의 욕구를 더 중요시하며 타인의 인정이나 애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인정, 이후에는 선생님. 그 이후에는 연령이 증가할수록 점차 친구나 애인으로 그 대상이 점차 확산이 된다. 하지만 2-30대가 훨씬 지났음에도 여전히 부모에게 얽매여 자신의 욕구를 죽여 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듯하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효도인 것처럼, 그렇게 하면 부모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여전히 유아기적 사고를 갖고 행동을 하는 것이다. 제 3자가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는 부모와 자신 모두를 망치게 되며 함께 불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 당장은 부모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부모의 행복, 혹은 내가 자식으로서 효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욕구가 좌절되면 내면의 분노가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되기 때문에 그 화를 풀 대상이 필요하게 된다. 그때의 대상은 공교롭게도 내가 효도하고 싶어 했던 부모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때 그나마 건강하게 화를 내는 것이 자신의 욕구가 좌절된 그 사안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데, 아마도 이런 관계에서는 자신의 욕구가 좌절된 그 특정 사안에 대해 화를 내지도 못할 것이고, 그 외에 다른 작은 일들에 대해 화를 터뜨릴 가능성이 높다. 즉, 부모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기 때문에 실제 사건에 비해 큰 감정이 올라오게 되고, 여러 가지 작은 일들로 부모와 갈등을 빚게 되는 것이다.
이런 특성을 보이는 부모-자식은 이미 얽히고설킨 ‘애’‘증’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결국,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싶다는 전제하에 부모의 말에 순응을 하였는데 결국 부모에게 더 못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는 요구하고, 자식은 순응하고, 그로 인해 자식은 화가 나고, 그 화는 부모에게로 향하고, 부모에게 화를 낸 자식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다시 부모에게 순종을 하게 되는 끝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그 악순환을 끊어야, 진정으로 부모와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쇠하신 부모가 그 고리를 끊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장성한 자식이 나서야 할 때이다. 자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짜 효를 행하는 길이 아닌가 싶다.
착한 사람인 것마냥 느껴지는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내 덫에 내가 걸리게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다른 사람에게 거절을 잘 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있거나, 타인의 감정이나 욕구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은 진짜 가까이에서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하게 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착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는 사람을 싫어하는데도 나도 사람인지라 간혹.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통제가 잘 되지 않는다.
속고 또 속아도 자연스럽게 가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이지 않겠나 싶다.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 책임만 진다면 그 또한 누가 욕을 하겠는가. 다 자업자득이겠지. 다른 사람의 일은 두 눈 크게 뜨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 많은데 내 일에는 오히려 눈을 감게 되니 참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더 아파봐야 그만하겠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