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감정이나 행동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 나오는 마츠코의 자기-파괴적인 행동들, 자신의 삶을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드는 그녀의 선택에 대해 관객의 입장으로서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사 한마디로 그 이해 안 됐던 행동이 모두 이해가 된다.
“맞아도 좋아, 죽어도 좋아, 외톨이만 아니면.”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아무리 무모하고 자기-파괴적이라고 할지라도 당사자 본인에게는 이득이 있다. 그리고 그 이득을 위해 주도적으로 선택한 행동과 감정이다. 마츠코는 아픈 동생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웃긴 표정을 짓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공부를 하며,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교사가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살아갔지만 마츠코의 외로움과 헛헛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과 함께 있어줄 남자를 만나지만 어김없이 사기꾼이거나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거나 유부남이었다. 마츠코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남자는 없었다. 모두가 그녀를 도구처럼 이용했다. 그럼에도 마츠코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자기 최면을 거는 듯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채, 그런 남자들 옆에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마츠코는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스스로가 채워나갈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타인에 의해, 남자에 의해 자신의 외로움이 해결될 수 있다고 전적으로 믿는다. 이에 대한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마츠코 스스로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며, 어떤 활동을 좋아하는지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 함께 있는 남자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혹은 사랑받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거기에만 몰두해 있다.
철학자 체셔 칼훈(Cheshire Calhoun)이 ‘행위 주체성(agency)’이 발휘되지 못하는 ‘배경틀’로서 언급한 부분들을 보자면 마츠코의 행동 중 일부는 이해할 수도 있다. 칼훈에 의하면 행위주체자로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주체성을 잃게 된다고 한다.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혹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 행위의 주체자로서 행동을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외부의 힘에 의해 좌절되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행위주체자로서의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삶의 행위자가 되어 스스로 이끌어나가려는 동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처럼 마츠코 또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마츠코의 생각이나 감정이 존중받지 못해왔기 때문에 환경에 맞춰 아버지의 요구에 맞춰 수동적으로 살아온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마츠코의 외로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키는 상대에게 있는 것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내 존재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츠코는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자기-비난적이며 자기-혐오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를 사랑받지 못할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그러한 마츠코에게도 자신의 존재가 빛이 난다고 느낄 때가 있다. 바로 남자를 만날 때이다. 어떤 의도였던 상관없이 한 남자가 다가와 마츠코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그때부터 아름다운 인생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이런 원리로 인해 의존적인 여자들은 자신의 삶의 주체성을 남자에게 부과하여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내 삶의 모든 권한이 남성에게 있기에 나의 외모, 친구 관계, 직업 선택, 가족 관계, 혹은 성적 자율성에 대한 통제까지 받게 된다. 여자친구나 아내의 외모 지적이나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거나, 하물며 남편의 외도조차도 아내가 여자로서의 매력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사회적 기준이나 비난들이 의존적인 여성들의 죄책감만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남편이 잘못했고, 아내를 지적하는 사회적 기준이나 시댁 식구들이 잘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의존적인 삶을 선택한 행동의 폐단이다.
마츠코도 마찬가지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남성이 마츠코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마츠코를 상품화시켜서 자신의 사업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혹은 오로지 복수를 위해 그녀를 이용하더라도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랑도 의심치 않는다. 그녀를 파괴하는 남성이라 하더라도 현재 자신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츠코는 사랑받는다고 느끼며 행복하다고 최면을 걸기 때문이다.
앞서 칼훈이 언급했던 양상과 마츠코의 양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자신의 삶에서 행위주체성을 잃게 되면 의기소침해지고 동기가 저하되어 무기력한 상태로 빠지게 되는데, 마츠코는 남자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열렬히 행동한다.
절망에 빠져 우울해질 법도 한데 마츠코는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더라도 또 내일을 살아간다.
이러한 원동력은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츠코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찾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자신의 존재감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남성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느껴지기에 그토록 남성에게 매달렸던 것뿐이다.
마츠코의 건강한 자존감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건강한 자기 가치감을 찾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바로 ‘수치심’이 아닐까 싶다. 수치심의 자의식적 측면을 중시한 철학자 테일러(G. Taylor, 1985)는 수치를 “자아-보호(self-protection)”의 정서로 보고 있다. 수치심을 타인의 시선에 의한 타인 지향적이고 허용되는 것과 금지되는 것을 규율하는 규범적 감정으로 보는 기존의 입장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수치심을 윤리적 취약성의 측면이 아니라 윤리적 자기 보호 측면의 감정으로 접근한다. 그녀가 수치심을 해석하는 독특한 면은 수치를 느낄 능력과 ‘자신을 존중하는 능력’을 연결시키는데 있다. 그녀는 수치를 느낄 능력을 상실하거나 혹은 수치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과 자신을 존중하는 능력이 결여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고 가치롭게 여기며, 나의 가치가 손상되는 상황에서 수치심을 느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수치심을 함양시킬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