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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Jan 19. 2022

희랍어 시간이 필요한 계절

침묵, 존재를 관통하는 언어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희랍어 시간, 7쪽)


보르헤스의 묘비명과 칼. 그에게 칼은 무엇이었을까. 어느 연구자의 말처럼 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벽을 상징하는 것이었을까. "희랍어 시간"의 화자는 보르헤스에게 찾아온 실명은 그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서슬 퍼런 칼과 같았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삶을 천착하여 쓴 듯한, 말을 잃은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를 한다.


여자는 아무런 원인도 전조도 없이 갑자기 말을 잃어버렸다. 청소년기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 여자는 모국어가 아닌 낯선 외국어가 침묵을 깨뜨렸던 것을 기억한다. 여자는 그 경험치에 의존해 가장 낯선 언어인 희랍어 수업에 다닌다.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언어를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자신 앞에 놓인 칼을 스스로 뛰어넘고 싶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에 독일로 이민 가 모국어 대신 낯선 독일어를 공부했던 남자. 남자는 눈에 이상이 생겨 점점 시력을 잃어간다. 남자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훗날 앞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받는다. 독일어를 모국어로 가진 이들 속에서 그들에게도 낯선 희랍어만큼은 아주 잘했던 동양인 남자. 더 이상 낯선 사람 취급을 받지 않는 삶을 원한 남자는 서른한 살에 모국으로 돌아온 뒤 희랍어 교실을 연다.


희랍어 시간. 여자와 남자를 만나게 해 주는 시간이다.


그들은 상대가 처한 상황을 모른다. 그들에게 서로는 그저 한 공간에 있는 타인일 뿐이다. 그들을 가로막는 칼 앞에서 그들은 어떻게 서로를 읽어주고 서로를 들어줄 수 있을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여자는 침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여자의 침묵에 대해 진단하려 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이 간단한 것이 아님을 안다. 가장 친밀한 언어가 자신을 공격하고 자신을 할퀴는 고통을 겪은 뒤 언어의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 결국 늪 같은 침묵 속에 가라앉아버린 사람의 깊은 속내를 어떻게 간단하게 진단하고 정의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도 가장 낯선 언어가 자신의 침묵을 무너뜨려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의 허허로운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 침묵은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모든 언어가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19쪽)


남자는 젊어서 한 때 사랑했던 한 여자에 대해 낱낱이 기억한다. 그녀가 했던 행동, 눈물에 온통 젖어 번들거렸던 그 얼굴, 남자의 얼굴을 후려친 단단했던 주먹을 기억한다. 기억할 때마다 마음으로 용서를 구한다. 용서할 수 없다면, 남자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남자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만나던 그 여자는 들을 수 없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남자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수화와 메모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두려웠다. 자신이 눈이 멀어 영영 보지 못하는 날이 올 때는 어떻게 연인의 마음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남자는 그녀에게 묻는다.


"독순술 수업에서 배운 대로, 무슨 말이든 나에게 해줄 수 있어요?"


눈물이 흐른 자국처럼 긴 상처를 얼굴에 남긴 결별. 남자는 그날을 회고하며 그때의 젊은 연인에게 편지를 쓰곤 한다.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48쪽)


한 존재가 한 존재를 관통하려면 얼마나 많은 언어가 필요한 것일까. 들려야만, 보여야만,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우리는 이미 언어의 노예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어가 아니면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소리를 잃고 눈을 잃은 뒤에는 어떻게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나. 묵직한 침묵을 어떻게 견딜 수 있나. 침묵 속에 깃든 속내를 어떻게 알 수 있나.


누군가는 말한다. 접촉 만이 소리와 눈이 없는 세계를 열어나갈 수 있다고. 가까이 다가가 만지고 쓰다듬고 냄새를 맡으며 느끼는 존재. 세상과 단절된 희랍어를 다시 살려내는 그들(몇몇 수강생들)의 만남처럼 닫혀가는 소통의 문을 꽉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기꺼이 허락한 접촉에 의해서라고.


#고백하자면 말이야......  내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책을 내게 되면, 그게 꼭 점자로 제작되었으면 좋겠어.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끝까지 한 줄 한 줄 더듬어서 그 책을 읽어주면 좋겠어. 그건 정말...... 뭐랄까, 정말 그 사람과 접촉하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110쪽)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한 줄 한 줄 읽어주는 책처럼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알아가는 사이라면 긴 침묵 속에 담긴 속내를 알아채지 않을까. 그렇다면,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들리지 않는 것에 보이지 않는 것에 두려움 따윈 없으리라. 그러나 조급한 마음에 상대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돌아서버린 인연들. 먼 훗날 다시 그런 상황들과 맞닥뜨릴 때, 그때는 그 인연을 놓치지 않고 붙들 수 있을까.


#그때 왜 가슴이 서늘해졌던 걸까. 느리디 느린 작별을 고하는 것 같던 그 광경이, 헤아릴 수 없는 무슨 말들로 가득 찬 것 같던 침묵이, 여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마치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대답해주었던 것처럼. 뼈아픈 축복 같은 대답은 이미 주어졌으니, 어떻게든 그걸 내 힘으로 이해해내야 하는 것처럼.(115쪽)


보르헤스는 세계는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 이라고 말한다. 보르헤스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각자가 가진 환상과 꿈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산다는 것은 꿈속처럼 어둡고 붙잡을 수 없는 아득한 관계-붙잡은 것 같았으나 어느새 날아가 버린 파랑새 같은-속에서 헤매는 일인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가장 낯선 언어와 언어가 만나 말문을 열고 서로를 해독하며 걷는 긴 꿈같은 것. 해독 불가능한 언어를 해독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환상 같은 것.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손에 닿는 누군가를 느끼고 붙잡아야 하는 것, 잠깐의 반짝임을 잡아채어 곁을 밝히는 것, 삶은 그런 것이다. 뼈아픈 축복 같은 대답을 이해하고 여자의 침묵을 읽어낸 남자처럼, 순간의 찬란한 빛을 놓치지 않은 남자처럼, 심해의 숲에서 비로소 언어를 되찾는 여자처럼... 비록 해독 불가능할지라도 어두운 침묵을 관통하는 순간들을 모아 면면히 이어가는 것이다.


희랍어. 이미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언어. 우리에게, 사어는 무엇일까. 들어도 들리지 않는 상대의 말, 읽어도 읽히지 않는 상대의 마음이 아닐까. 혹시 우리의 존재 자체가 희랍어인 것은 아닐까.


깊어가는 가을. 내게 희랍어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의 언어를 생각해 본다. 누군가에게 희랍어가 되어버렸을 내 언어를 생각해 본다. 우리 앞에 놓인 긴 칼을 가늠해본다. 어떻게 해야 그 칼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과연 가능할까. 막막한 슬픔이 깃든다. '희랍어 시간'이 필요한 계절이다. 나는 지금 그 계절을 건너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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