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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Jan 18. 2022

사람, 지와 사랑의 결정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민음사」를 읽고

책을 읽을 때면 작가 연보를 유심히 살펴볼 때가 있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 삶의 이력이 궁금해서이기도 하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특이한 이력을 발견하게 되면 그 작가의 작품을 탐독하기도 한다. 때론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작가도 생긴다.


헤르만 헤세에 대한 연보를 살펴보면 그는 미소년 시절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에 입학 후 7개월여 만에 그 학교에서 자퇴하고 만다. 선교사였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헤세 자신은 수도원 학교의 엄격한 규율에 반감을 가졌었고 시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시계공장과 서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도 한다. 그의 그런 이력은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헤세 스스로 자신의 자서전과 같은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는 이 작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다 보면 헤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골드문트를 통해서 헤세가 그 시기에 겪었던 정신적 갈등과 방황을 짐작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책을 읽을수록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는 것을 느낀다.  


한 인간이 태어나 살아가면서 겪는 생사고락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롯이 자신의 것이다. 탄생한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삶의 지도라고 표현한다면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지도를 갖게 된다. 똑같은 지도를 가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낮은 등고선이 이어지고 연녹색이 많은 지도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파르고 좁은 등고선에 갈색이 많은 지도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가든지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지도이다. 그리고 그 지도는 죽음이라는 종착지에서 끝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자신의 고유한 지도를 그려가는 인물들이다.  지적 성장을 갈망하는 나르치스는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며 혹독한 수도사의 길을 간다. 골드문트는 한 때 이성적이고 통제 가능한 정신을 가진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것은 정작 자신이 원하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허상을 쫓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의 본성 깊숙이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능력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아차린 골드문트는 수도원 밖으로 나온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그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고자 내린 결정이었다.


골드문트는 몇 해 동안 세상을 떠돌며 곳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여인들과 몸을 섞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몸이 원하는 삶을 산다. 그것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삶이었고 끊임없는 욕망에 화답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러한 삶에서 마냥 환희를 느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몸이 느끼는 쾌락은 잠깐일 뿐이고 시시때때로 밀려드는 정신적 공허와 마주한다. 그는 틈틈이 고독했고 외로웠다. 그 고독은 젊음이 소실되는 것,  아름다움과 사랑은 손에 잡히지 않고 끝내 손가락 끝으로 빠져나가버리는 것, 늙음과 필연적 죽음을 깨달은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공허함에 사로잡힐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 세상의 많은 어머니, 생명을 잉태하고 죽음을 보듬어주는 이브를 생각하고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친구, 나르치스를 생각한다.


탄생과 소멸, 젊음과 늙음.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몸일까 마음일까. 골드문트는 노년에 이르러 늙음과 죽음이 가진 숙명을 받아들인다. 사랑과 환희와 고통과 절망이 깃들어 굴러가는 삶. 어떤 삶을 살았든 모든 생명이 반드시 가야 할 길인 죽음. 골드문트는 젊어서 떠돌 때부터 목도했던 수많은 죽음의 필연성을 떠올리고 자신도 그 길을 향해 걷고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 굴복하기 전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불멸케 하고자 한다. 육체는 소멸되지만 그들을 사랑했던 자신의 영혼에 의해 영원히 살아 있게 하고 싶은 것이다. 골드문트는 자신의 감각이 시키는 대로 조각상을 만든다. 그것은 그가 세상을 떠돌며 몸으로 체득한, 그의 삶에 감각이라는 이름으로 스며든 사람들은 것이었다.


오랜 시간을 육체의 갈망에 화답하며 떠돌던 골드문트는 죽음에 이르러 나르치스가 있는 수도원으로 돌아온다. 골드문트의 죽음을 조용히 지켜보는 나르치스. 골드문트보다 더 오래 살게 되는 나르치스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신을 상징하는 나르치스는 우리가 죽은 뒤에도 남는 어떤 고귀한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궁극적으로 추구해할 이상을 상징하는 것일까.


헤세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끊임없이 인간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인간을 알고자 했던 헤세는 자신의 분신인 골드문트로 하여금 인간의 오욕칠정을 담은 조각상을 만들게 한다. 그 조각상은 인간의 내면에 귀 기울였던 헤세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자신의 예술작품에 궁극적으로 담고자 했던 주제는 인간이었고 인간의 영혼이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 수행을 통해 영(지)적 성장을 이룬 나르치스가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바람에 부흥하는 인물이라면 육체적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다 조각상을 남긴 골드문트예술가의 삶을 산 헤세 자신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골드문트 탕아처럼 세상을 떠돌면서도 끝내 나르치스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 헤세수도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 그의 면에 영성이 가득했었음을 반증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골드문트 빚은 조각상에 내는 나르치스의 찬사는 혹독 성장통을 이겨내고 예술가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응원인지도 모르겠다.


육체적 본능(감)에 충실한 삶, 영(지)으로 절제하는 삶. 어떤 삶에 더 의미를 둘 것인가. 이 물음은 무의미하다. 둘은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가진 본성은 끝내 소멸로 귀결되며 소멸의 허무함은 예술로 승화된다. 예술이 가진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고 예술을 증진시키고 전승하는 것은 나르치스로 대변되는 정신이다. 지금 우리가 헤세의 문학 작품을 읽고 골드문트가 탐구하고자 했던 삶의 지도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것도 나르치스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세상은 골드문트와 나르치스의 조화로움 속에서 영속될 수 있다. 어느 것 하나가 우세하여 균형이 깨진다면 영속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 내게 선택권을 준다면 나는 감히 골드문트를 따르고 싶다. 사람을 통해 체득한 깨달음 골드문트의 영혼에 문신  것처럼 나도 세상 선생을 통해 더 깊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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