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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May 04. 2022

소명을 받드는 이,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작가라는 직업은 어떤 소명을 가진 직업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한강의 글을 읽을 때면 그런 생각이 더 굳건해집니다.


이 책,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자전적 소설인가?'라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작품 속 설정들이 한강의 다른 작품과 비슷했기 때문이에요. 자전적 소설이 아니라 해도, 이 작품의 소재로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들을 생각해 볼 때 한강은 소명을 받들어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어요.


한강은 광주의 학살에 대해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고 읽던 그때 너무 고통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고 해요. 오랜 시간 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으며 이 책에 나오는 작가처럼 실제로 악몽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폭력에 대한 글은 쓰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새 제주 4.3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제주에 대해 쓰는 동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해요.


무엇이었을까요? 한강을 편하게 해 준 것이.

한강은 더 이상 폭력에 관한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부채의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결코 작별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채의식 말예요.

그런 마음은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 드러나 있어요. 5.18에 대해 쓰기 위해 광주에 갔을 때 옛 도청 상무관의 마룻바닥이 뜯기고 있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는 너무 늦게 왔음을 자책했어요. 왜 더 일찍 오지 못 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으며 후회합니다.


그렇기에, 의도하지 않았으나 은연중에 남아 있던 부채의식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 제주의 이야기를 쓰게 하지 않았을까. 제주 이야기라는 커다란 질항아리의 표면에, 역사의 부채로 남은 여러 폭력들을 그림으로 그려 넣어 다시 한번 상기시켰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들과도 작별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담아서요.


오랜 세월 꼭 해야 할 말을 가슴에 묻고 그 말을 들어줄 누군가를 기다렸던 제주 아주머니처럼, 그 일들이 시간에 탈색되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사진처럼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더라도, 그들의 죽음과 고통을 잊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견고히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진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역사를 통과한 여성들의 증언.....

베트남의 밀림 속 마을들을 헤매 다니며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기록.

1940년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할머니의 치매에 걸린 일상을 다룬 기록.

그리고 1948년 제주의 이야기.


이 세 편의 이야기를 연결해 만들 예정이었던 장편영화의 작품명 '삼면화'는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누군가는 뒤를 이어 각각의 깊이 있는 이야기로 완성해내지 않을까, 한강이 그 밑그림을 그려 놓은 것은 아닐까, 어쩌면 한강의 다음 작품은 그들 중 하나를 소재로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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