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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Dec 13. 2022

소리, 나는 너의 존재를 듣는다

『소리와 분노』, 윌리엄 포크너, 문학동네를 읽고

이 세상에는 모래알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며 살아간다.

세상에 많은 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 새소리... 와 같이 사람이 내는 소리를 그저 한낱 소리로 치부해버릴 수 없음은 ‘너와 나, 우리’라는 존재로 형성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관계 속에서 제 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우리는 화를 내기도 하고, 애원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때론 절망으로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한 관계 속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리와 분노』는 포크너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으로 미국 남부 지주였던 콤슨 가(家)의 몰락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네 명의 화자(콤슨 가의 아들들과 하녀)가 등장하며 4개의 각 장은 그 화자의 이름을 따서 벤지 섹션, 퀜틴 섹션, 제이슨 섹션, 딜지섹션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캐디를 포함해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벤지 섹션의 화자 벤지는 세 살 전에 뇌 발육이 멈춘 말 못 하는 백치이다. 언어를 획득하지 못한 그는 단순한 소리-울부짖음, 낑낑거림-로 자신을 표현한다.

벤지의 서술에는 시간 개념이 없으며 어렸을 때부터 서른 세 살인 현재까지의 이야기가 뒤죽박죽이다. 마치 안갯속을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묘한 끌림이 있다. 그것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한 포크너의 기법 때문인데 읽다 보면 작가가 던지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도전의식이 생긴다.


벤지 섹션에서 안갯속을 헤매다 희미하나마 어떤 길을 발견할 즈음 퀜틴 섹션을 만나게 된다. 퀜틴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콤슨 가의 딸 캐디와 큰아들 퀜틴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짐작하게 되며 이 챕터에 제시된 시간이 다른 챕터에 비해 18년 정도 앞선 이유를 알게 된다. 그것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퀜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관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음이 여린 퀜틴을 통해 그려지는 캐디는 가엾은 누이이며 벤지와 아버지에게 따뜻한 가족애를 가진 존재이다.


캐디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미지가 생긴 후 이어지는 제이슨 섹션.

둘째 아들 제이슨은 늘 과민한 상태에 있으며 현실적이다. 가족에게도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제이슨을 통해 앞의 두 섹션에서는 모호했던 이야기가 좀 더 확실한 윤곽을 잡아간다.

아버지와 퀜틴의 죽음, 캐디와 (그녀의 딸) 미스 퀜틴의 처지, 콤슨 가의 현 상황, 그리고 미국의 시대적 상황 등을 알 수 있다.   


앞의 세 화자가 주관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했다면 (흑인 하녀)딜지 섹션에서는 콤슨 가의 진실이 좀 더 객관적인 시선에 의해 보여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이른 새벽길을 나서 뿌옇던 안갯속을 거닐다 드디어 안개가 걷힌 대로를 만났지만 아직도 머릿속은 개운하지 않다. 불친절한 포크너가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퀜틴이 아버지에게 누이 캐디와 근친상간을 했다고 말하는데 의식의 흐름에 따른 표현법을 사용해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근친상간을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라는 의문을 갖고 퀜틴 섹션을 다시 읽게 만들었다.

다시 읽으며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 포크너 문체가 가진 매력이다.


살면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콤슨 가의 구성원들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소리를 내며 살아가거나 살다 갔다.  


아버지는 알코올에 빠졌고, 엄마는 곧 죽을 목숨이라는 말로 침대에 누워 스스로를 아픈 사람으로 만들며 아이들을 방임하고, 퀜틴은 절망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캐디는 애정 결핍을 밖에서 채우려다 혼전 임신을, 제이슨은 과민하며 계산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캐디의 딸 미스 퀜틴은 돈을 훔쳐 집에서 달아난다. 그리고 벤지는 소리 지르고 울부짖고 분노한다.  


이러한 모습은 시대가 변했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현재의 이야기도 되는 것이고 또한 미래의 이야기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더니즘의 진수라는 극찬을 받은 이 작품이 몇 세대가 바뀐 지금도 보편적 진리라는 가치를 발휘하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리라.


존재란 무엇인가?


포크너는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긴 시간(영겁)을 놓고 봤을 때 순간(찰나) 일뿐이며 죽음은 빛의 이면인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고 결국 스러져 소멸하면 한 톨의 먼지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말한다.


# 내 너에게 이것을 주는 건 시간을 기억하라 함이 아니라, 이따금 잠시라도 시간을 잊으라는 것이요, 시간을 정복하려고 인생 전부를 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101


# 산 자가 죽은 자보다 낫단다 하지만 산 자든 죽은 자든 다른 산 자나 죽은 자보다 별로 나을 게 없어.

136


# 아버지는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는 기후의 총합이라고 했다. 인간은 기타 이런저런 것들의 총합이야. 불순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하나야. 이 문제는 끈덕지게 변함없는 무(無)로 이끌리는데, 이 무는 흙과 교착상태야. 166


# 그림자들 속으로, 그림자들 위에 앉은 가벼운 먼지 같은 지나간 슬픈 세대들의 발소리가 메아리치는 속으로 구부러져 올라가는 계단이 있을 뿐이었다. 내 걸음이 그 그림자들을 깨웠으며 그 먼지들은 다시 가볍게 내려앉았다. 228


사실, 존재로서 자신을 내세우는 일은 어쩌면 퀜틴이 어느 시계 수리점에서 본, 시간이 모두 제각각인-멈추지 않고 가고 있지만 맞는 시계는 하나도 없었던-열두어 개의 시계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 진열창 안에는 시계가 열두어 개 있었는데, 그 열두어 개의 시간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시곗바늘이 없는 내 시계처럼 저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양립하지 않는 확신에 차 있었다. 서로 틀리다고 반박했다. 내 시계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볼 수 없는데도, 설령 볼 수 있다 한들 시간을 알려줄 수 없는데도, 그것은 호주머니 속에서 계속 째깍거리고 있었다. 113쪽


이렇듯, 존재라는 것은-숨기려 해도 호주머니 속에서 째깍거리는 시계처럼-결국 동등하게 자기주장을 가진 것, 누구에게도 영속되지 못하며 혼자서 걷다 혼자서 가는 것이리라. 할머니, 아버지, 퀜틴처럼.


그런 존재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포크너는 작품 속에서 당시의 미국 사회와 구성원들의 삶을 보여준다. 명문가라는 허명에 사로잡혀 막내 벤지의 장애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엄마, 벤지가 제 구실을 못한다는 이유로 얼치기, 미치광이, 바보 천치로 규정하는 마을 사람들, 왜곡된 그림자(관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다 자살하는 퀜틴, 계산적이고 비열한 태도를 합리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채 천륜을 가로막고 조카의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제이슨, 하버드라는 인류 대학 학생을 통해 보여지는 미국 지식인들의 단면, 지리적 자격 요건을 두고 사람을 평가하는 학부모 그리고 작품 전반에 깔린 흑인에 대한 생각들.... 과 인내하고 포용하고 희생하는 딜지와 캐디를.


그리고 독자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하버드에 다니는 지성인이나, 거리의 여자 취급을 받는 캐디나, 흑인 하녀 딜지나 그 어떤 인간도 죽음 앞에서는 결국 백치 벤지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영겁 속 찰나를 사는 한 톨의 먼지 같은 우리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떤 소리를 내고 어떤 일에 분노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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