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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Oct 28. 2022

나는 원초적 고난이라 하겠다

아니 에르노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한 소회

지난 10월 6일 한림원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 올해의 노벨문학상으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수상자의 인터뷰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그녀가 건재했구나. 아, 그녀도 늙음을 선물 받았구나.'였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녀의 책

「사진의 용도」를 읽으며 갖게 된 연민 때문이었다. 세상에 스러져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어쩌면 그녀도 스러져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건재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반가웠었다.


나는「사진의 용도」를 읽으며, 고인이 된 구하라를 떠올렸었고 설리를 떠올렸었다. 그리고 한 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었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의 저자 서갑숙 씨를 떠올렸었다.


'외설과 예술은 한 끗 차이'라는 말.

'포르노그라피'라는 말..


이 말들의 함의를 생각했었다. 표현의 자유와 세속적 잣대에 대해 생각했었고 문화적 이질감이라는 말 또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들을 다 가라앉힐 만큼 강렬하게 나를 흔든 것은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그녀의 처지에 대한 애석함이었다. 죽음은 아직도- 모든 것을 덮어버릴 만큼- 나를 감상적이게 만든다.


그래서, 유방암 투병 중에 만난 연인과 가진 쾌락의 흔적들- 아무렇게나 벗어던져 뒤엉킨 옷가지와 신발 들, 발기된 성기, 함께 3일 동안 지냈던 호텔 방의 모습 등-을 사진 찍음으로써 생의 찰나를 붙잡고자 했던 그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나에게 아니 에르노는 개인적인 소재로 놀랄 만큼 사실적인 글을 쓰는 작가로 인식되어 있었다. 때문에

한림원의 노벨문학상 수여 이유를 보며 어떤 점을 말하는 것인지 어림짐작은 됐었지만 그래도 읽고 확인하고 싶었다.


어제 늦은 오후에 책을 받았고 오늘 이른 아침에 이 책을 다 읽었다. 대개 책을 읽고 정리할 때는 두 번 이상 읽고 글을 쓰는 편인데 이 책은 읽으며 내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들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마디로

"이 책은 깊은 생각을 요하는 문장이나 공들여 해석해야 되는 구절들이 있는 작품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다. 달리 말하면 '사랑에 빠진 사람의 행동은 공감과 비공감의 영역이지 이해와 해석의 영역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는 뜻이다.


이 책은 그 대상만 다를 뿐, 미리 읽은  「사진의 용도」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글쓰기를 통해 그 사람과 나눈 대화와 몸짓의 시간을 붙잡아 두려 했다는 점이 그렇다. 사랑이란 감정의 유한성과 그로 인한 쓸쓸함이 글 군데군데 배어 있는 것도 닮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사랑은 애초에 불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고 그 사랑에 의존하는 그녀의 모습은 더더욱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버려질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그 고통을 스스로 끝내버리려고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집착. 그럴수록 점점 더 낮아지는 자존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상간녀의 입장밖에 아닌 그녀의 자리.


곁에 있다면 이제 그만 끝내라고, 제발 더 이상 기다림의 속박에 갇혀 있지 말라고 만류하고 싶을 만큼 보고 있기가 딱했다.


이 작품에는 상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순전히 에르노에 의해서만 둘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텍스트가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상대남의 마음을 안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내 생각이 달라졌을까. 자신이 상대남의 여러 섹스 파트너 중 하나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에르노이지 않은가. 본인이 그렇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오로지 한 남자만을 향해 수신기를 내걸고 온 신경을 그곳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랑이 원초적인 힘을 가졌을 때나 가능하다. 원초적인 것은 그 무엇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졌으니까.

아니 에르노에게 사랑은, 그녀의(사랑하는 이와 치르는) 정사에 대한 욕망은 먹고, 자고, 싸는 것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그 나이에 모든 것을 내 건 사랑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상담일을 하면서 배우자의 외도로 고통받는 이들의 사연을 수 없이 들어왔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여럿 알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사랑은 천형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질병, 그저 그 고난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것 말고는 달리 치료법이 없는 질병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은 '아니 에르노는 천형을 받고 있었구나.'였다. 그러니 그녀가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던 그 기간 동안 그녀를 송두리째 지배했던 것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원초적 고난'이었다고 하는 것이 는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아니 에르노가 직면했던 그 고난으로 그녀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그녀의 글은 또 어떤 이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인가. 글의 제목에 예수의 수난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넣은 그녀의 뜻에 이 시대가 보낸 메시지, 노벨 문학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글을 읽은 나는 이제 어떤 사고의 변화를 겪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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