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뭇잎과 나뭇잎, 가지와 가지 사이의 빈 공간을 보았다. 그 공간으로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은 그림자도 남기지 않은 채 소리 없이 지나가는 듯하지만 나무를 스치며 생명을 불어넣는다.
바람은 어떤 언약도 하지 않는다. 언약이 없기에 자유롭다. 바람은 형체가 없어서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다른 물체를 통해서만 존재가 증명되는 바람. 이 세상에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받는 것들이 있다면 그 대표적인 것이 바람 아닐까.
나무가 심하게 흔들린다.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저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일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바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언젠가 듣지 못한 어떤 말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람의 마음을 담은 말. 사람의 진심을 담은 말. 차마 하지 못 했던 말을 저 바람에 실어 보냈을 것만 같다.
바람이 부는 날엔 가만히 바람 소리를 듣는다. 윙윙 대는 바람의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