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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Jan 12. 2022

백일홍을 위한 헌사

여인의 고혹미를 가진 꽃


한여름이 지나고 햇빛의 맹위가 수그러들 때쯤이면 빛에 바랜 모습으로 시선을 끄는 꽃이 있다. 여린 자태로 바람을 맞는 코스모스보다도 더 애틋한 마음으로 눈길 머물게 하는 꽃, 백일홍이다. 사위어가는 가을 햇살 아래 색이 바랜 백일홍을 볼 때면 나이 든 여인의 고혹미가 느껴진다.

백일홍은 초여름부터 늦여름까지 개화 시기가 일정하지 않으나 100일 동안 피어 있는 속성으로 인해 서리가 내릴 때까지 꽃을 볼 수 있으며 국화와 함께 대표적인 가을꽃으로 분류된다.

백일홍은 홀로 있어도 무리 지어 있어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도심의 가로수 밑이든 가정집의 잘 정리된 화단이든 넓은 들판이든 개의치 않고 꽃의 본분을 다한다.


어디에서든 진한 색감으로 자태를 뽐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백일홍은 한여름의 뙤약볕과 바람을 오롯이 받아들여 시나브로 스스로를 탈색시킨다.

그녀는 고난에 저항하지 굴복하지도 않는다. 다만 묵묵히 받아들이고 감내할 뿐이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햇살이 한풀 꺾인 가을날이면 그녀는 이제 자신도 부드러워져야 함을 안다. 벼가 익어가고 억새가 피는 들판, 노랗게 물들어가는 집 앞 은행나무를 보며 그녀는 자신의 색을 버리기 시작한다.


젊어서 한 때 고운 색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그녀는 놓아야 할 때와 모든 스러지는 것들의 이치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풍경과 어우러지기 위해 천천히 천천히 자신의 색깔을 버린다.

한여름, 청춘의 싱싱함이 절정에 치달았을 때 화려한 색감으로 벌 나비의 시선을 끄는 것이 숙명이었듯 이제는 주변과 어울리는 풍경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소명임을 안다.

조금은 더러워지고 더러는 상처 난 꽃잎, 오그라들고 이지러져버린 모습이 때론 생기를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수수한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매혹적으로 보이는 늦가을의 백일홍. 가을 들판이 특별히 아름다운 이유는 빛과 바람에 바랜 모습으로도 무한한 매력을 발하는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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