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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처방이 나에게 맞지 않았다

밤이 너무 길었다. 내가 흩어졌다.

by 나이현


어질러진 방과 책상을, 바닥에 떨어진 것 하나 줍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며 잠에게서 깨어나온다. 아침에는 공복에 약을 하나 먹는다. 약을 제때 먹기를 해낸다는 점으로 하루를 살아내야 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뭉그적 일어난다.

약을 처방받고 한동안은 착실하게 병원을 다녔다. 병원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약과 선생님은 도와주는 것일 뿐 대부분은 내 힘을 길러야만 한다. 우리가 그걸 모르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서도, 하여튼 어느 것이든 쉽지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게 어려우니 병원을 찾는 것이므로 너무 다그치지 말기로 결심하며 늦은 아침을 먹는다.


상담을 할 때는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을 느꼈고 어떤 생각을 했고. 그런 내 이야기를 한 번 더 되짚어보고 설명하며 아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서 힘들었구나, 다시 깨닫게 된다. 그러다 보면 진료가 끝나고 때에 맞게 약을 받는다. 생각보다 뭐가 없는 듯싶을 수도 있겠으나 내 이야기를 누군가한테 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개운함을 준다. 나는 힘든 집의 예민하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장녀로 태어났으니 다른 이에게 내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웠다. 내 얘기를 아무에게도 못 하는, 일기장에나 끄적일 수 있는 이라면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맞는 처방을 하는 것과 내 얘기를 잘 들어주는 것은 다른 것 같다.


내가 정말 힘든 때에, 그러니까 정말로 약을 무진장 쏟아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느끼던 때에 병원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이제와 생각한다. 난잡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개강한 까닭에 나는 적응이 매우 더뎠는데, 그에 따른 우울과 무기력이 나를 나올 수 없는 우물에 빠뜨리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그 길로 예약날짜보다 더욱 빠르게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약을 조금 더 높여 처방받는 것 말고는 진전이 없었다. 나는 내 마음의 원인이나 해결 방법을 원했다. 내 이 망가진 마음이.. 원인불명인 마음이 궁금했다. 나는 모르지만 전문가라면 발자취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다녔던 것이다. 속도는 나지 않을지라도 내가 왜 이따구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지는지, 조금은 알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신과는 처음이라 별다른 대처를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많이 알아본 것도 아니었고 그저 가까운 곳으로 간 것이니까. 당연히 처방받은 약은 나를 살려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밤이 너무 길었다. 참기 힘든 우울이 몰려왔다. 내가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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