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순간마저 나는 사랑하고 말았다.
이 일은 내가 한창 사는 게 힘들었을 때, 그러니까 암투병하던 아버지를 병간호하고 내 인생의 개새끼로 남을 사람으로 인해 피폐해진 마음을 달래지 못한 채 개강했을 적의 이야기이다. 그날은 여느 때처럼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좀처럼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때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이 들어서 성적에 큰 무리가 가지 않는 한에서 자체휴강을 하곤 했다. 그렇다곤 해도 꼴에 성적 욕심이 있던 터라 강의를 들을 때엔 제법 열심히 들었던 나인데 강의 내내 잡생각만 들었다.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교수님이 하셨던 "앉는 자리에서 성적이 결정 난다, 뒷자리에 앉은 학생은 항상 성적이 안 좋더라."는 말씀에 심술이 나 항상 뒷자리에 앉아 좋은 성적을 내리라는 결심이 아주 잠깐 무너진 때였다. 강의 자료만 멀뚱 응시하고 있다가 문득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펜 좀 사고 책 구경 한번 해야 하는데,,'
그게 시작이었다. 평소 대형서점에서 신간과 베스트셀러를 구경하는 데 꽤나 시간을 들이고 있다. 또다시 쿨타임이 돌아 며칠 전부터 교보문고를 가고 싶단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귀차니즘으로 원래 계획했던 것도 중간에 그만두고 마는 나였기에 미루고 미루고 미루느라 이제는 가려고 했던 것도 잊어버린 기억이다. 그게 갑자기 떠오르더니... 거의 없다시피 한 내 실행력을 발휘해 청량리에 있는 교보문고로 향하게 했다.
원래는 잠실점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어졌다.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 생각이 든 순간, 혼자서 버스를 타고 한 번도 안 가본 거릴 거닐 생각에 나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보이는 풍경이 멋지냐 안 멋지냐는 상관이 없다. 잠실점 말고, 새로운, 안 가봤던 곳, 먼 곳은 귀찮으니(이제 와서) 제일 가까운 곳. 그게 청량리점이었다.
가서 거창한 것을 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냥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고, 가는 길에 신나게 노래 들으며 바깥 구경 좀 해주고. 백화점 구경 슬쩍하고 바로 교보문고로 가서 신작 소설 몇 개 읽어보고, 에세이도 좀 보고 마케팅에 관한 책도 훑어보고. 핫트랙스 구경하면서 펜 좀 사고. 그게 다다. 원래는 혼밥도 해볼까 했는데 딱히 땡기는 먹거리가 없길래 관뒀다. 그렇게 몇 주 전부터 눈여겨봤던 신하영 작가의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이야기> 하나 달랑 사들고 다소 짧은 여행을 끝마쳤다. 그날 지하철은 추석 연휴 전날인 탓에 선물세트, 캐리어와 사람들로 꽉 찼고 더웠다. 더운 와중에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조금 멀리 핸드폰을 두드리거나 노래를 듣는 사람들 사이로 서서 책을 읽는 사람이 보였다. 키가 커서 주위에 비해 혼자 우뚝 올라와 있어 바로 시선이 그쪽으로 갔던 것 같다. 책 반절을 반대쪽으로 펼쳐 접어 한 손으로 펜과 같이 쥐고 집중하는 모습에 눈이 갔다. 나는 이런 순간들이 좋아서 그의 방향을 조금 오래 응시하다 창밖을 보았다. 바깥은 아주 살짝 노을 색이 일어있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앉을 수 있게 되었을 땐 나도 핸드폰 대신 책을 꺼내 들었다. 원래도 가끔 책을 갖고 다니며 읽곤 했지만 오늘은 그 청년을 봤으니(같은 대중교통 독서인)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역시 교보문고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와, 연인과 함께 다니는 것도 정말 즐거운 일이지만 혼자 다닐 수 있는 것 또한 중요하다. 혼자서 놀러 다닐만하다는 건 내가 나를 잘 알고 적절히 놀아줄 수 있다는 것이니까. 사실 그때의 나는 이런 게 좀 필요했다. 숨 쉴 구멍 없이 막힌 내 삶과 나를 환기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그날 그렇게 즉흥적으로 행동했던 건 뇌가 나에게 한숨 쉬라며 신호를 보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내 안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 나를 움직이게 한다.
살면서 이러한 기억쯤은 계속해서 만들어 놓아야 한다. 나에게 그림자가 언제 드리울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늘진 나를 가장 효과적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지키려면 지금의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과거의 내가 있어야 한다. 삶은 누구나 행복하겠다 싶은 일만으로는 살아지지 않는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행복을 찾고, 낙관을 찾아야만 살아진다. 흔히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고 하지만, 더 많이 사랑하면 더 많은 곳에서 삶의 이유가 생긴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이 사랑할 것이다. 창밖 풍경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순간마저 나는 사랑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