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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찻잎향기 May 08. 2020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저자 이주현 _ 차가운 성장의 시간을 기록한 에세이

서평단 도서 리뷰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왜 이 책에 끌렸을까. 

삐삐언니, 조울, 사막 – 이라는 세 단어의 엉뚱한 조합 때문이었을까. 

‘삐삐언니’라는 단어가 주는 명랑함과 ‘조울’, ‘사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삭막한 분위기의 부조화 문장.

그러면서 짐작되는 맥락 또한 있었다. 그렇게 명랑하고 초긍정적일 것 같은 사람이 견뎌내야 하는 ‘조울병’은 그 깊이가 어마어마했으리라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조울의 사막’을 어떤 방식으로 견뎌냈을까. 

2001년부터 20여 년, 뜨거움과 차가움의 끝을 왔다갔다 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상반되는 감정이 주기적으로 덮쳐온다는 두려움을 과연 어떤 힘으로 견뎌냈을까.      


그 힘의 핵심은 기록치료사랑 – 이라는 단어로 집약될 것 같다     


이 책은 저자가 바람 한 번 불면 날아갈 글들이라도 붙들고 완성한 비로소 평범한 행복을 찾기까지의 차가운 성장의 시간을 기록한 에세이이다. 이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뜨겁고 차가움의 아픔과 그 과정에서 남겨 둔 병상의 기록들. 그리고 가족의 사랑.      


나를 포함하여 보통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조증과 울증을 조금씩 안고 살아갈 것 같다. 다만 그것어 어마어마한 공포와 병적 치료 대상이 되지 않을 뿐. 

그렇다면 이 책은 어느 즈음에서 유용함을 지닐까. 

예방 차원이 아닐까 싶다


아... 이것이 이 “조울병”의 심각한 증상이구나. 병원에 이렇게 입원하게 되고 이런 과정을 겪는구나. 가족들은 이 병을 이런 식으로 수용해야 하는구나. 

도움 아니 되는 책이 없겠지만. 위의 요소만 따지더라도 이 책은 (아직은 병의 경계에 놓여 있어서) 조울의 증상이 심하다 여기지 않는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지침서이자 예방책이 담겨 있는 책이라 믿는다.      


책으로 들어가 보자.      


딱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4)     


책을 전체적으로 읽다 보면 이 첫문장을 - 프롤로그- 받아들이게 된다. 

'조울의 사막'이라는 다소 거창한 명명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과부하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자칫 밋밋한 신변잡기적인 생활문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담백함이 오히려 이 책을 가까이 두게 하는 미덕이 될지도 모르겠다. 

분명 슬픔이 기저로 깔리는 경험과 기록들인데 '읽느 이의 마음을 후벼파지 않는 그런 글' - 이것이 저자가 말한 '딱 나같은 글'이었나보다 싶다.      

그래서 매우 담담하게 읽어 내려갔다. 뜨겁거나 차가운 모래 위에 쓴 글들임에도, 지독한 자기 연민과 혹독한 치유의 과정을 기록한 글임에도, 독자는 뜨겁게 울컥하는 어떤 것보다는, "음.. 이렇게 견뎌낼 수 있겠구나"하는 위안을 받는다. 

그러다 눈물이 찔끔 났을 수도 있다. 세상을 향해 허무한 눈길을 날릴 수도 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곧,

"음... 나도 그랬었지" 하면서. 싱겁지만 적합한 공감과 치유를 받기도 한다.      


(57쪽)     

영화<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나 몇몇 소설에서 정신병원은 음울한 공간으로 묘사돼 있다. 병든 사람을 치료하기보다는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획일적인 사회규범을 거스르지 않는 인간으로 개조하는. 감옥처럼 좁고 컴컴한 방에서 삶의 의지를 잃은,           


(56쪽)     

석 달의 입원 기간은 매우 긴 시간이었다. 그중 마지막 열흘 정도만 빼고 조울병 환자라는 사실을 부인하며 의료진과 또 자신과 끊임없이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아무리 ‘환자’로 불리길 거부해도 가슴 한켠에선 정말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진짜 환자임이 명백해질 경우 덮쳐올 엄청난 절망감을 회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조울병. 보통 정신 질환으로 취급하는 이 병에 대한 인식과 함께 조울병 환자들이 수용될 병원 또한 감옥 같은 정신 병원이 떠오른다. 

현실 세계에서는 허구와 상상이 만들어 낸 감옥같은 곳이 아니라할지라도, 강제로 갇히고 수용될 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여기서 독자로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그냥 조울병을 암처럼 ‘불치병’ 그 이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일까. 암의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처럼, 조울병의 원인도 그냥 모르는 채로 반려 질병으로 안고 살아가면 안 되는 것일까.      


저자 이주현은 이런 질문에 응답하듯이 말한다.      


“만약 지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누군가가 상담을 요청한다면 뭐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상사에게 정확한 상태를 알리고 힘겨운 업무에서 벗어나라고 할까? 아니면 나처럼 먼저 그만두겠다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잘릴 때까지’ 그 자리에 있으라고 할까?

아직도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내게 조증을 호소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말할 거다. 의사를 찾아가라. 술을 마시지 말아라. 사람과의 접촉면을 줄여라. 잘 안 되겠지만 혼자서 빈둥대라. 울증 환자에겐 이런 조언을 할 거다. 의사를 찾아가라. 아깝더라도 업무량을 줄여라. 산책하라스스로 먹을 음식을 천천히 준비하라조증이든 울증이든 핵심은 이거다. 괴로우면 의사를 찾아가라.” (150쪽)


위의 밑줄 그은 문장은 내가 참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장이다. 내가 만약 병에 걸렸다면. 그리고 의사를 찾아가라 – 가장 신뢰되는 응답이라 여긴다.      


실패의 기록 그 자체도 누군가에게는 보석 같은 해답이 될 수 있다. 

이 책이 그런 것 같다. 저자의 기나긴 투병생활과 그에 대한 기록, 그리고 그 결과가 성공이든 진행중이든. 그 모든 기록은 어떤 단 한 사람에게는 절박한 문장()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조증의 전조,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듯한 느낌, 충동적인 행위, 두려움 등”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경험들. 그런 유경험자들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능소화였다. 화려하고도 처연하게 타오르던 꽃이 떨어지는 소리는 의외로 평범했다. 떨어진 꽃잎을 보는 사람의 마음은 울렁이지만, 꽃 떨어지는 소리도, 땅에 떨어진 꽃잎도 천연덕스러웠다. 개화가 화려함이라면 낙화는 평화였다.” (252쪽)     


이 책은 위의 화려함과 평화의 길목에서 서성이는, 조증과 울증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잔잔한 일렁임과 함께 치유의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다. 

투병 경험과 그러한 일상, 그리고 파도처럼 일어났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한 내면의 (불편한 것까지 모두 포함한) 세밀한 기록들이 한 줄기 빛으로, 많은 경계인들(환자와 일반인 사이)에게 큰 위로와 예방책을 안내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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